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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니버설발레단 ‘그램 머피의 지젤’ |
호주 안무가 그램 머피(65)가 재창조한 처녀 유령 ‘윌리’는 한국적 한(恨)의 정서를 품은 여인이었다. 남자에게 버림받은 후 복수심에 불타는 밤의 악령이 됐다. 은발을 풀어헤치고 흰 옷을 입은 채 무덤에서 기어나오는 그들은 ‘전설의 고향’에 나오는 처녀 귀신을 연상시켰다. 처연한 고전 발레 동작 대신 팔 다리를 창처럼 날카롭게 움직이며 남자를 위협했다.
안무가는 107년 전 초연한 고전발레 ‘지젤’의 우아한 춤을 버리고 스토리와 감정만 가져왔다. 21세기 감성에 맞게 캐릭터와 춤을 바꿨다. 원작에서 시골 처녀 지젤은 귀족 알브레히트의 사랑에 들뜨고 그의 배신에 충격을 받아 심장마비로 죽는다. 그러나 머피의 지젤은 분노로 가득차 밤의 악령 미르텔의 품으로 달려간다.
1막에서 토슈즈를 신지 않은 지젤의 춤은 자유로웠다. 팔 다리를 물결치듯 움직이며 감정을 표출했다. 상체를 사각으로 고정시키는 고전 발레 공식을 완전히 버렸다. 형식보다는 내면에 충실한 지젤이다.
지젤을 짝사랑하는 마을 청년 힐라리온과 알브레히트의 대결도 원초적이다. 주먹질을 하고 발을 차며 갈등을 춤춘다. 알브레히트와 그의 약혼녀 바틸드, 지젤과 힐라리온의 4인무도 인상적이었다. 힐라리온은 알브레히트의 등을 타고 있는 지젤의 팔을 당기고, 바틸드는 알브레히트를 끌어가려고 애를 쓴다. 사랑의 사각 관계를 극대화한 춤이었다.
음악과 의상, 무대 세트의 선명한 대조를 통해 입체적인 무대를 완성했다. 작곡가 크리스토퍼 고든은 지젤의 세계는 가죽과 목재 타익기로, 알브레히트 세계는 금속 타악기 연주로 격렬한 음의 충돌을 일으켰다. 원작에서는 지젤은 평민, 알브레히트는 귀족 신분이지만 이 작품에서는 각각 자연과 문명 세계로 나뉜다. 지젤과 마을 사람들은 편안한 옷을 입은 반면에 바틸드와 알브레히트 동료들은 과장된 디자인 의상을 입었다.
밤의 악령을 선택했지만 지젤의 사랑이 변하지는 않는다. 원작처럼 미르텔에게 붙잡힌 알브레히트를 살려주려고 애쓴다.
이번 작품에서는 지젤의 어머니이자 마을 제사장 베르트가 맹활약해 미르텔을 물리친다는게 새롭다. 머피는 원작에 없는 지젤의 부모와 미르텔의 관계를 첨가했다. 미르텔이 지젤의 아버지 울탄에게 배신당해 밤의 악령이 된 후 복수극을 펼친다.
지젤이 하늘로 승천하는 장면도 한국적이었다. 원작에서는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원작 스토리에 살을 덧붙이고 현대적 감각의 춤으로 요동친 이 작품은 국내 발레계에 신선한 자극제가 됐다. 고전 발레의 창조적 패러디로 발레 레퍼토리를 풍성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장선희 세종대 무용과 교수는 “고전 발레 색채를 완전히 버리지 않고 색다른 해석을 보여줬다. 국내 발레 공연 지평을 넓히는데 한 획을 그은 공연이었다”고 호평했다.
머피의 통찰력이 돋보인 이 공연은 17일까지 계속된다. 070-7124-1733
[전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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