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보니까 가슴이 울렁거려요. 세월이 흘러 이제 제가 일흔다섯살입니다. 당시 저는 신인이었는데 연기를 보니 지금도 많이 아쉽네요.”
옆에 있던 정진우 감독이 “바람이 불고 비가 내려서 (배우들이) ‘정진우 죽어라’ 하면서 찍었다”며 말을 보탰다.
7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한국영상자료원이 주최한 ‘1940~1980년대 극영화 94편 발굴 기자회견’이 열렸다. 1949년부터 1988년까지 한국 영화사를 빛낸 작품 94편이 공개됐다. 이 중 정진우 감독의 데뷔작 ‘외아들’, 임권택 ‘전장과 여교사’, 이만희 ‘잊을 수 없는 연인’ 등 5편의 일부가 이날 상영됐다. 유실된 줄 알았던 작품이 다시 세상에 빛을 본 것을 기념하는 자리에는 임권택, 김수용, 최하원, 정진우 감독과 배우 김지미 등 원로 영화인들이 참석했다. 미국에 사는 김지미는 이 행사를 위해 잠시 귀국했다고 했다.
한국영상자료원의 이병훈 원장은 “지난 3월11일 연합영화공사 한규호 대표로부터 그간 유실된 것으로 추정돼 실체를 확인할 수 없었던 한국 영화 94편을 비롯 총 450편의 필름을 기증받았다”고 했다.
연합영화공사는 한규호 대표가 1970년대 종로 일대에서 운영되던 순회용 영화필름 배급업체 10여 곳을 통합하여 설립한 회사다. 당시 배급업체는 전국 지방도시를 돌며 영화를 상영했다. 순회 영사업에 종사한 부친을 따라 영화배급을 한 그는 개인 창고에 한국영화 수백편을 보관중이었다. 영상자료원측은 2013년 ‘또순이’(박상호, 1963) DVD 발간 작업 중 만난 임태영 감독으로부터 제보를 받고 한 대표를 찾아갔다. 한 대표의 부자는 50여년간 2000편을 모았지만 화재와 수해로 상당부분 잃었다고 했다. 남아 있던 필름도 장시간 실온에 노출돼 훼손이 심각했다. 영상자료원은 두달간 정밀 실사를 거쳐 한국영화 94편을 확인했다.
한 대표는 “1970년 말에 한국필름보관소(영상자료원 전신)에 극영화 19편과 녹음 대본 등을 기증한 바 있다. 남아있는 필름을 부인과 내가 보수하면서 정성것 관리했는데 기증한 뒤에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이 자료가 잘 보존되고 관리돼서 보다 많은 이들이 영화를 활용하는데 작은 보탬이 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수집 작품 중 가장 오래된 것은 1949년 노필 감독의 ‘안창남 비행사’다. 한국 SF 영화의 첫 장을 연 이창근 감독의 SF물 ‘마법선’(1969), 최초 여성 시나리오 작가인 홍은원 감독의 1962년작 ‘여판사’도 눈길을 끈다.
한국영화 보유율은 증가했다. 1940년~1980년대 제작된 한국영화는 4238편 중 2787편이 확인된 상태였으나 94편이 더해져 보유율은 65.8%에서 68.0%로 높아졌다. 50년~70년대 영화는 보존 작품이 적었으나 이번을 계기로 한국영화사의 사료가 풍부해진 것으로 평가된다.
한국영상
[이선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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