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대의 사회적 기업인 행복나래(주). 영세한 사회적 기업의 판로를 개척해주며 ‘사회적 기업을 돋는 사회적 기업’으로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행복나래가 사회적 기업으로 다시 태어나기까지는 강대성 대표의 노력이 빠질 수가 없습니다. 사회적 기업으로의 전환부터 탄탄한 내실을 다지는 것 또한 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그런 강대성 대표의 이야기를 MBN ‘정완진의 The CEO’에서 직접 만나 들어봤습니다. 아래는 인터뷰 전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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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래-
Q. 어린 시절을 회상해 보신다면?
전라도 광주에서 7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습니다. 부모님을 비롯해 우리 7남매 모두가 매우 성실했습니다. 저 역시도 학교생활에 늘 성실해 크고 작은 대회에는 모두 참가할 정도였고 우수상을 받는 등의 성과도 낼 수 있었습니다. 또 초, 중, 고등학교를 거치면서 개근상을 단 한 번도 놓친 적이 없는 학생이었습니다.
Q. 대학시절 꿈이 있으셨다면?
당시 사회 분위기도 그랬고 ‘수출만이 살길이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대학도 무역학과에 진학을 했고 수출과 무역 일을 하기 위해서는 ‘영어’도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해 친구들과 서클을 만들어 영어 공부에도 매진했습니다. 그럴 정도로 수출과 무역에 대한 큰 꿈을 지니고 있었죠. 그래서 대학을 졸업하면서 친구들은 거의 금융권에 취직을 하는 반면 저는 ‘SK그룹’에 입사해 제 꿈을 펼쳐보고자 했습니다.
Q. 입사 후, 신입사원 강대성은 어떤 사람이었나요?
‘감사팀’에 입사를 하게 되었는데 선입견 없는 신입사원이 감사 업무를 잘 볼 것이라는 회사의 판단에서였습니다. 원했던 ‘영업부’는 아니었지만 선배들을 따라다니며 열심히 업무를 익혀 나갔습니다. 감사팀 업무는 모든 부서의 업무를 익히고 있어야 하는 부서였기 때문에 신입사원인 저에게 많은 도움이 되기도 했습니다. 제 성격답게 늘 성실하게 업무에 임했고 다른 부서 사람들과도 스스럼없이 어울리기도 했죠.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제가 점점 부정적으로 변해간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감사팀 업무가 다른 부서의 업무를 항상 개선하고 꼼꼼히 봐야했기 때문이었죠. 위기는 기회라고 이때 부서를 옮기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SK이노베이션의 영업부서로 옮겨가게 되었습니다.
Q. 부서를 옮긴 후, 어떻게 일을 해 나가셨나요?
전국의 주유소로 영업을 나가야 했습니다. 주유소 사장님에게 SK상호를 달고 운영할 수 있도록 하는 일이었는데 당시만 해도 주유소를 운영하시는 분들은 마을의 ‘유지’였기에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무작정 영업을 할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죠. 먼저 그들과 친해지는 것이 우선이었습니다. 그들의 고충과 고민, 또 자랑거리들을 들으며주며 상담사 역할을 했다고 할까요? 그랬더니 곧 그들의 마음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고 영업으로 순조롭게 이어질 수 있었습니다.
Q. 그 결과, 어떤 성과로 이어졌나요?
순조로운 영업은 곧 저의 실적으로 이어졌고 좋은 실적은 빠른 승진으로 또 이어졌습니다. 과장, 차장, 부장을 거쳐 상무까지.. 임원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되었으니까요. 임원이 된 후에는 회사 전체를 둘러보고 경영에 관여를 해야 했기에 CEO의 자질도 어느 정도 키울 수가 있었습니다. 특히 저는 조직원들의 단합에 굉장히 많은 힘을 쏟았습니다. 조직원들의 사기 진작이야말로 회사가 발전 할 수 있는 밑거름이기 때문입니다. 직원들과 간담회도 자주 갖고 말로 다 하지 못한 이야기를 하고 또 듣기 위해 조직원 개개인에게 이메일을 보내 그들의 마음을 읽었습니다. 또 울산공장에서 인천에 있는 물류센터까지 마라톤을 개최하면서 조직원들의 사기를 북돋아주고 서로의 소중함을 함께 느낄 수 있게 했습니다.
Q. 행복나래의 대표이사가 되신 계기는?
제가 처음 대표이사 제안을 받았을 땐 ‘행복나래’ 가 아닌 ‘MRO코리아’라는 중소기업의 소모성자재를 유통하는 기업이었습니다. 이곳의 대표이사 자리를 제안 받으면서 ‘사회적 기업으로 전환’도 함께 제안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MRO코리아’의 지분을 가지고 있던 미국 협력사 측에서 어찌된 일인지 저의 대표이사 취임을 반대했고 그렇게 6개월 간을 본부장이라는 직책으로 출근을 하게 되었죠. 설상가상 ‘MRO사업’ 에 대한 좋지 않은 기사들이 언론에 나오기 시작하면서 직원들의 사기마저 바닥으로 향해가고 있었습니다. 저는 한시라도 빨리 제가 대표이사로 취임해 사회적 기업으로 전환을 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해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저의 간절한 부탁으로 미국 협력사 측의 지분을 사들여 마침내 대표이사로 취임할 수 있게 됐습니다.
Q. 대표이사로 취임 후, 가장 먼저 하신 일은?
사명을 ‘행복나래(주)’로 바꾸고 본격적으로 사회적 기업이 어떤 곳인가를 공부해 나가고 시장조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꿈꾸는 사회적 기업, ‘행복나래는 어떤 사회적 기업이 되면 좋을까?’를 많이 고민했습니다. 많은 시장조사 끝에 우리나라에 많은 영세한 사회적 기업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들을 돕는 사회적 기업이 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직접 그들에게 달려가 고충과 고민을 듣던 중에 ‘판로 개척에 무척 애를 먹는다.’는 얘기를 듣게 되었고 그들의 제품을 꼼꼼히 살펴보았습니다. 품질면에서 어느 하나 여느 중소기업에 못지않게 좋은데 영세한 탓에 판로를 찾지 못한다는 것이 매우 안타까웠고 우리가 그들의 판로를 개척해 주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기존 ‘MRO코리아’에서 중소기업의 소모성자재품을 유통했다면 우리 ‘행복나래’는 영세 사회적 기업의 소모성자재품을 유통해줌으로써 판로를 개척해 주는 것이었죠.
Q. 계획대로 일은 잘 진행 되셨나요?
네. 소모성자재품만 아니라 비소모성자재들은 카탈로그를 제작해 판로를 열어주는 등 많은 새로운 시도를 했습니다. 또 직원들과 봉사활동이며 1일 영세 사회적 기업 체험을 가 그들을 돕고 이해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물건이 유통 되고 있는 물류센터에는 취약 계층을 고용해 일자리까지 마련해 주며 사회적 기업으로 가기위해 무던히 많은 노력을 했고 고용노동부에 ‘사회적 기업 인증 신청’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Q. 이러한 과정에서 힘든 일은 없으셨나요?
앞에 말한 저런 수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기업으로 인증 받지 못했습니다. 그때의 좌절감은 이루 말로 표현을 할 수 없었습니다. ‘세상이 우리를 알아주지 않는구나.’라는 패배 의식에 젖을 정도로 정말 많이 힘들었고 직원들 또한 서서히 사회적 기업의 직원으로 자부심을 갖고 있을 때 이런 일이 생기니 많이 힘들어했습니다.
Q. 위기를 어떻게 극복하셨나요?
‘행복나래’를 바라보며 열심히 일하는 취약 계층과 영세 사회적 기업의 사람들을 떠올렸습니다. 그리고 직원들, 가족들의 모습을 떠올리니 여기서 주저앉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문서보다는 행동으로, 실천으로 보여주자는 생각에 다시 한 번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SNS 등을 통해 더 넓게 판로를 넓히는가 하면 거래하는 영세 사회적 기업도 더욱 더 엄선해서 늘려나갔습니다. 그런데 이런 노력에 보답이라도 받듯, 곧 사회적 기업 인증 받게 되었고 ‘사회적 기업을 돕는 사회적 기업’으로 국내 최대 사회적 기업으로 거듭 나게
Q. 앞으로의 꿈이 있다면?
국내 최대 사회적 기업으로만 머무르고 싶지 않습니다. 더 많은 사회적 기업을 돕고 취약 계층을 도와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본보기가 되는 사회적 기업으로 거듭나는 것이 저의 꿈입니다. 또 ‘행복나래’와 함께하면 더 좋은 사회적 기업이 될 수 있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회적 기업으로 만들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