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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모델 역사의 첫 페이지를 넘겨보면, 모델센터 도신우 회장의 존재를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패션과 모델이라는 단어가 낯설기만 하던 시절, 모델에 뛰어들어 이제는 당당히 CEO로 우뚝 선 도신우 회장. 수십 년간 국내외 수많은 패션쇼를 진행, 기획하며 패션업계 최고의 프로듀서로 인정받고 있는 도신우 회장이지만, 그 위치까지 오르기까지에는 눈물겨운 노력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의 성공 스토리를 듣기 위해 ‘정완진의 The CEO’ 제작진이 직접 그의 사무실을 찾았습니다.
그는 대학시절 옷이 좋아 하루에도 몇 번씩 옷을 갈아입을 만큼 ‘옷’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였다고 합니다. 패션쇼에 서면 입었던 셔츠, 넥타이, 구두, 심지어 양말까지 준다는 이야기를 듣고 모델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게 되었다고 밝혔습니다.
“당시 맞춤양복 가격이 만 이천 원에서 만 오천 원 정도였는데, 당시 대기업 초봉 수준과 맞먹는 가격이었습니다. 그런 옷을 공짜로 받을 수 있다고 하니 귀가 솔깃했죠.”
그렇게 우연히 모델 일을 시작하게 됐지만, 그것은 그의 천직에 가까웠습니다. 옷을 좋아하는 그였으니 일이 재미있을 수밖에 없었고, 도신우 회장은 아예 프로모델로 전향을 하기로 마음을 먹게 됩니다. 하지만 1960년대 당시는 패션모델이라는 직업이 제대로 자리 잡히지 않았을 때였습니다.
“남성모델이라는 단어 자체가 생소할 때였습니다. 인기 배우들이 모델 역할을 겸했고, 전문 모델이라는 것은 없었던 시절이었죠. 그나마 여성모델은 점점 직업화되어 가는 분위기였지만, 상대적으로 남성모델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첫 단추를 잘 끼워야겠다 싶어, 1969년 모델 김광수 선생님을 필두로 저를 비롯해 총 7명의 남성모델들이 모여 ‘왕실모델클럽’을 결성하게 됩니다. 남성모델을 보다 전문화, 직업화시키기 위한 첫 움직임이었죠.”
왕실모델클럽을 조직화를 계기로 도신우 회장을 찾는 곳은 폭발적으로 많아졌습니다. 인기 배우 못지않은 인물과 키를 갖추고 있었으니 도신우 회장이 업계 사람들로부터 러브콜을 받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연출자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것은 해외의 패션쇼를 보고 난 뒤였습니다.
“영국 런던에서 열린 패션쇼에 제가 한국 대표 모델로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본 패션쇼는 그야말로 문화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패션쇼를 성공적으로 개최하겠다.’는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너무 신기했어요. 연출자라는 이름으로, 패션 스타일리스트라는 이름으로, 메이크업 아티스트라는 이름으로, 음악 감독이라는 이름으로 말이죠. 당시 한국의 모습만 상상해보더라도 무슨 일이든 모델들이 알아서 해야 하는 시스템이었거든요. 꾸미는 것도, 옷을 정하는 것도, 패션쇼 순서를 짜는 것도 말이죠.”
이후, 그는 해외 패션쇼를 다니며 패션쇼 연출 시스템을 벤치마킹하기 시작했고 1984년에 모델센터 인터내셔널을 설립하며 본격적으로 사업가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가까운 일본으로 가서 많이 배워왔습니다. 무대, 조명, 음향을 세팅하는 방법이나 연출 기법, 모델을 어떻게 캐스팅하고 훈련시켜야 하는 지 등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배우려고 애썼죠.”
하지만 사업이 처음부터 순탄하지만은 않았습니다. 모델 오디션 제도 등 선진 시스템을 정착시키는데 수많은 시행착오가 뒤따랐기 때문입니다.
“아예 없는 데서 집을 하나 짓는 느낌이었습니다. 엄청난 시간, 노력을 들여야 했죠. 맨땅에 하나의 건물을 지어나가듯이 하나씩 하나씩 노력하며 제도를 정비하고 시스템을 바꿔나갔고, 그것이 쌓이고 쌓여 현재에 이르게 된 것이죠.”
그렇게 하나 둘 패션쇼를 성공적으로 선보이기 시작한 그는 점점 능력을 인정받게 되고, 국내외 유명한 디자이너, 패션 브랜드, 명품 브랜드들의 패션쇼까지 도맡게 됩니다.
얼마 전 타계한 앙
이 외에도 도신우 회장은 IMF 당시 겪었던 위기, 부산 프레타 포르테 패션쇼를 성공적으로 이끌기까지의 에피소드를 이번 방송에서 단독 공개했습니다. 모델에서 CEO로 거듭나기까지 우여곡절 많은 도신우 회장의 성공이야기는 2월 16일 MBN ‘정완진의 The CEO’에서 만나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