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아버지를 모시며 아이 둘을 키우던 평범한 주부, ‘바늘이야기’의 송영예 대표. 우연한 기회로 ‘뜨개질’이라는 취미를 가지게 되었고 이를 통해 지금은 성공한 사업가로 이름을 날리고 있습니다. 그런 그녀가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뜨개질 사업을 일구어 나가기까지의 이야기를 MBN ‘정완진의 The CEO’ 제작진이 직접 취재했습니다.
아래는 인터뷰 전문입니다.
Q. 어린 시절에도 뜨개질에 관심이 많았나요?
A. 어린 시절엔 뜨개질에 대해 잘 몰랐고요. 그냥 손재주가 굉장히 뛰어났어요. 미술 시간이 기다려질 정도로 무엇을 만들고 그리는 것을 잘했었죠. 집에 있는 옷으로 다른 옷을 만들어 바자회에 낼 만큼 손재주가 좋았어요. 하지만 집안 사정으로 미대 진학은 하지 못했고 직장에 들어갔죠. 직장에 들어가서도 미술이 좋아서 공예 학원에 다니곤 했어요.
Q. 뜨개질, 어떻게 처음 접하게 되셨나요?
A. 결혼하고 별 다른 취미 생활 없이 살림에만 전념했었어요. 그런데 옆집 아주머니가 취미라도 가져보라며 뜨개질을 가르쳐 주셨는데 차분한 제 성격이랑도 너무 잘 맞고 재미있더라고요. 어린 시절부터 손재주 있다는 소리도 자주 들어서 금방 배우기도 했고요. 그 때 이후로 실이랑 바늘이 제 주변을 떠난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그러다보니 실력도 금방 늘어났고 어느덧 제가 다른 주변사람들에게 뜨개질을 가르쳐주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뜨개질 하는 방법을 제공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요.
Q. 많은 사람들에게 뜨개질 하는 방법을 알려주기 위해 선택한 방법은?
A. 1995년도 쯤 PC통신이 유행했어요. 그래서 저도 PC통신에 뜨개질 동호회를 만들었죠. 거기에 제가 뜨개질 하는 방법 같은 걸 올렸는데 반응이 굉장히 좋았어요. 그런 동호회는 처음이었고 뜨개질에 목말라 있던 사람들이 생각 외로 많더라고요. 그런 점이 장점으로 발휘 돼서 입소문을 많이 탔죠. 한날은 어떤 잡지사에서 저를 찾아와 뜨개질 하는 방법을 기고하는 건 어떻겠냐고 제안을 해왔어요. 뜨개질 하는 방법을 더 많은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다는 생각에 기고를 하기 시작했고, 그 역시도 반응이 좋아 서적까지 출간하게 됐습니다.
Q. 서적 출간 당시 반응은 어땠나요?
A. 뜨개질은 일본이 종주국이라 일본 저자가 만든 서적이 시장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그런지 한국 저자가 뜨개질 책을 출간했다고 하니 사람들에게 신선한 소식으로 다가 온 것 같아요. 불티나게 팔리는가 싶더니 베스트셀러까지 됐어요. 그 여세를 몰아서 인터넷 쇼핑몰까지 오픈을 하게 됐죠. 쇼핑몰도 뜨개질 업계 쪽에서는 최초였어요. 베스트셀러 저자가 쇼핑몰을 오픈했다고 하니, 입소문을 타고 사람들이 많이 몰려들었고 주문량도 계속해서 늘어갔어요. 나중에는 힘에 부칠 정도가 되더라고요.
Q. 오프라인 매장을 하게 된 계기는?
A. 한창 쇼핑몰로 바쁠 무렵에 IMF로 남편이 사업에 실패 한 것이 가장 큰 이유였어요. 사실 처음에 뜨개질로 큰 사업을 벌이기보다는 취미생활을 하면서 할 수 있는 그저 소일거리로 생각했는데 실질적인 가장이 되고 나니 그러면 안 되겠더라고요. 쇼핑몰 운영에 책 출간에 뜨개질 강의까지 다녔죠. 힘들었지만, 그만큼 즐거움도 컸어요. 점점 사업에 대한 욕심도 커져갔고, 그러다가 제가 강의 다니던 문화센터에 작게 매장을 냈어요.
Q. 매장 오픈, 성공적이었나요?
A. 사람들이 많이 몰려들어서 점점 매장도 넓혀갔어요. 문화 센터 매장에서 벗어나 직접 회사를 차리고 손뜨개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편물기도 독점으로 들여와 도입하고요. 우리나라 최초의 뜨개질 매장, 또 IMF형 창업이라는 점에 언론에서도 많이 관심을 가졌었어요. 그러다보니 ‘바늘이야기’ 상호를 쓰고 싶다는 사람도 생겨났고 결국 프랜차이즈 사업까지 넓혀가게 되었죠.
Q. 평범한 가정주부에서 사업가가 되었는데 힘든 점은 없었나요?
A. 물론 있었죠. 프랜차이즈 사업을 시작하면서부터 어려움에 부딪히더라고요. 마구잡이로 가맹점을 내주다보니 부실한 가맹점이 생겼어요. 실을 대량으로 구매해가서 값도 지불하지 않고 가게 문을 닫아버리더라고요. 황당했죠. 매출은 늘어도 남는 수익이 없어지는 사태가 벌어지더라고요. 믿고 내준 가맹점인데 그렇게 배신을 당하니 실망감이 컸습니다. 그런데 설상가상 제가 항상 실을 구매해오던 남대문 시장에서 더 이상 저에게 실을 팔지 않겠다고 하는 겁니다. 제가 남대문의 소비자들을 다 뺏어가 버렸다고 하면서요. 자신들이 직접 고객들에게 팔겠다는 것이었죠. 당장 실을 구매해야 하는데 공급처가 막혀버리니 막막했습니다.
Q. 절체절명의 위기, 어떻게 극복하셨나요?
A. 먼저 프랜차이즈 같은 경우, 부실 가맹점부터 정리했어요. 구조조정을 한 거죠. 그리고 가맹점주들에게 뜨개질 교육을 체계적으로 시키는 등 철저하게 관리를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100개도 넘었던 매장이 80여개 밖에 남지 않았는데도 수익이 올라가기 시작했어요. 또 실 같은 경우는 일본 실을 수입해오는 남대문 시장 대신 유럽 실을 택했어요. 유럽 실의 색감이 우리나라 정서와 더 잘 맞는다고 생각되었고, 다행히 실도 독점으로 공급을 받게 되었어요. 실 차별화를 시작한 거죠. 점차 회사가 안정 궤도에 들어선 후부터는 실도 직접 자체 브랜드로 생산했고, 고급 수제 니트 브랜드도 만들어서 백화점에서 판매하는 등 회사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했습니다.
Q. 또 기억에 남는 노력, 성과 등이 있다면?
A. 먼저 ‘손뜨개는 취미일 뿐 산업이 될 수 없다.’는 인식을 바꾸기 위해서 ‘한국손뜨개협회’를 발족했어요. 처음엔 손뜨개는 대량생산이 안 될뿐더러 표준화가 되어있지 않다는 이유로 퇴짜를 맞았죠.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손뜨개 교육 표준화와 인적 인프라를 구축하기 위해 노력했어요. 그 결과 협회가 만들어지게 됐죠. 또 주먹구구식의 뜨개질 교육에서 벗어나기 위해 뜨개질 학원을 만들고 직업화시키기 위한 교육을 체계적으로 시작했어요. 이런 체계적인 교육이 앞으로 뜨개질을 산업화 시키는데 더욱
Q. 앞으로의 꿈이 있으시다면?
A. 뜨개질 기술학교를 설립하는 것이 제 꿈이에요. 무상 교육을 통해 뜨개질을 취미로 배우는 사람들, 그리고 뜨개질로 직업을 가지고 싶은 사람들에게 교육을 해줌으로써 뜨개질을 좀 더 직업화시키고 싶어요. 업계 선두주자로서의 어떤 사명감이라고나 할까요.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