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대에 진학해 대한민국의 기술을 진일보시키는 데 힘 쓰거라."
코리아에프티(주) 오원석 회장이 어렸을 때 아버지가 늘 강조하셨던 말이라고 합니다. 수십 년이 흐른 지금... 그는 부친의 뜻대로, 어느덧 기술보국의 꿈을 이룬 한 중견기업의 CEO가 되었습니다.
‘카본 캐니스터’와 ‘플라스틱 필러넥’이라는 자동차 부품을 국내 최초로 국산화 하여 자동차 부품업계에 혁신을 이끈 장본인이자 현재는 연매출 2,000억이 훌쩍 넘는 기업의 CEO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오원석 회장의 성공 이야기를 듣기 위해 ‘정완진의 The CEO’ 제작진이 직접 그의 사무실을 찾았습니다.
아래는 인터뷰 전문입니다.
Q. 오원석 회장님의 어린 시절은 어떤 모습이었나요?
A. 어린 시절, 시계란 시계는 다 분해해서 망가뜨리는 게 제 일이었어요. 그런 저를 보면서 아버지가 하셨던 말씀이 ‘너는 공대를 가서 이 나라의 공업 발전에 기여를 해라.’는 것이었어요. 나라가 잘 되려면 공대가 잘 되어야 한다는 게 아버지의 신조이기도 했죠. 어쨌든 아버지가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얘기하셔서, 저는 제가 당연히 공대에 가야되는 줄 알았습니다. 당시에는 제 적성에도 맞다고 생각했고요. 그렇게 해서 1971년 서울대학교 기계공학과에 입학했습니다.
Q. 자동차 부품 개발 국산화에 뛰어들게 된 계기는?
A. 대학을 졸업한 후, 대기업에 입사했습니다. 30대 중반이 되어서는 해외 플랜트 사업부의 부장으로 일을 하고 있었죠. 그러던 어느 날, 한 선배가 찾아왔습니다. 이 분이 바로 현재 코리아에어텍(주) 김재년 대표입니다. 당시 그 회사는 산업용 필터를 생산하고 있었는데, 자동차 부품을 개발하는데 같이 동참해달라고 하더군요. 그것이 바로 ‘카본 캐니스터’였습니다. 당시 우리나라 완성체 업체들은 그 부품을 일본에서 전량 수입하고 있는 실정이었습니다. 순간 이거다 싶었죠. 만약 국산화에 성공한다면, 우리나라 자동차 산업 발전의 역사에 큰 획을 긋는 일이겠다 싶었습니다. 긴 고민 끝에 직접 해보겠다고 했고요.
Q. 최초 개발이라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 시행착오가 많았을 것 같습니다...?
A. 당연히 많았죠. 처음에 들어오니 직원들과 대화부터 잘 안됐어요. 제가 대기업에서 쓰던 용어와 너무도 달랐으니까요. 그런데 그것보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생산현장이 굉장히 비효율적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생산현장의 비효율성을 제거하지 않으면 카본 캐니스터의 개발도 허황된 꿈에 지나지 않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부터 일주일에 절반은 사무실에서 먹고 자며 직원들과 함께 현장에 참여했고, 차근차근 변화해나갔습니다. 덕분에 6개월 만에 생산 효율은 2배로 올랐고, 이에 탄력을 받아 1987년에는 국내 최초로 카본 캐니스터를 개발하는 데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Q. 카본 캐니스터의 국산화 성공이 가지는 의미는 구체적으로 무엇인가요?
A. 일단 완성차 업체들이 일본으로부터 전량 수입해서 쓰던 것을 더 이상 수입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가장 큰 성과였습니다. 가격은 외제품보다 50% 싼데, 성능은 똑같았으니 완성차 업체 입장에서도 반가운 소식일 수밖에 없었죠. 저희의 개발로 인해 완성차 업체들은 약 6억 달러에 달하는 수입 대체 효과와 2천 억 원에 달하는 자동차 원가절감 효과를 얻었습니다. 또, 저는 제 나름대로 국산화에 최초로 성공했다는 자부심을 가지게 되었고요. 이 초창기의 성공이 저와 직원들에게 큰 용기를 심어주었고, 이후에는 ‘플라스틱 필러넥’이라는 자동차 부품도 국내 최초로 국산화 시키는데 성공하게 됐습니다.
Q. 위기는 없었습니까?
A. 1997년 IMF 때 당시 모든 기업들이 힘들지 않았습니까. 저희도 마찬가지였죠. 하지만 순간적으로 역발상을 해냈던 게 위기를 잘 극복해낼 수 있었던 비결이 아닌가 싶습니다. 위기 속에 기회가 있다는 말을 흔히 하잖아요. 당시 환율이 엄청나게 치솟고 있었는데, 달러를 확보하는 것이 살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태리 회사에 합작을 제안했고, 운 좋게도 그 제안이 먹혀들었습니다. 그 때 자동차 부품 쪽만 독립을 하자는 이야기가 나왔고, 그것이 지금의 코리아에프티(주)의 탄생 배경입니다.
Q. 현재 중국, 인도, 폴란드에도 법인을 두고 계신데요. 회사 규모가 어마어마한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해외 3개국까지 진출할 생각을 하셨는지?
A. 완성차 업체들이 글로벌화를 외치며 세계에 진출하는 상황에서 저희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죠. 국내 시장만으로는 성장에 한계가 있잖아요. 그래서 2003년 중국 진출을 기반으로 2005년에는 인도, 2007년에는 폴란드에 진출했습니다. 특히 폴란드에서는 자동차 인테리어 부품인 의장품을 집중 생산하는데, 이는 10년 후 전기자동차가 많아지면 연료계통 부품의 성장세가 둔해진다는 경제학자들의 의견을 받아들인 미래를 내다본 투자였습니다. 요즘은 해외 법인에서 내는 매출이 국내 시장 못지않게 어마어마합니다.
Q. 지금껏 자신이 일구어온 성과를 보며 드는 생각은?
A. 1987년, 제가 선배의 제안을 받고 회사에 입사했을 때는 연 매출 20억 원의 50명 남짓한 직원이 있는 작은 회사였습니다. 1997년 ‘코리아에프티’라는 회사로 자동차 부품 파트만 독립해 세웠을 때 당시 매출액은 200억까지 올라와 있었습니다. 카본캐니스터와 플라프틱 필러넥의 국산화 덕분이었죠. 그로부터 또다시 15년이 흐른 지금 연 매출 2,000억 원이 넘는 규모를 자랑하는 기업이 되었습니다. 국내외를 합치면 직원들의 수만 1,400여 명에 달하고요. 상당히 뿌듯하고 자
Q. 앞으로의 계획, 그리고 포부는 무엇?
A. 저는 매년 매출액의 10%를 연구개발에 투자하고 있습니다. 늘 미래를 대비하고, 준비하기 위해서입니다. 작년에는 5000만불 수출탑을 수상했는데, 올해는 7000만불 수출탑을 수상했습니다. 앞으로 더 성장하는 기업을 만들 것이고, 자동차 부품업계에서는 세계적 기업으로 우뚝 설 수 있도록 계속해서 노력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