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의 콤플렉스였던 ‘대머리’! 이를 감추기 위해 우연히 관심을 갖게 되었던 ‘가발’로 인생을 역전시킨 서울가발박사의 장만우 원장의 이야기가 사람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7월 7일 MBN ‘정완진의 The CEO'에서는 핀이나 본드가 필요 없는 특허 가발을 개발해 연 20억 원의 매출을 올리고 있는 서울가발박사의 장만우 원장의 이야기가 소개됩니다.
다음은 인터뷰 전문입니다.
Q: 1970년대, 남자 미용사가 흔치 않던 시절인데 어떻게 미용을 시작하셨나요?
A: 어렸을 때부터 미용실 안을 들여다보는 걸 좋아했어요. ‘나도 한 번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했죠. 그러던 중에 집이 너무 가난해서 중학교 진학을 포기했었어요. 시골에서 농사일을 돕다가 아버지께 ‘중장비 학원에 다니겠다.’고 거짓말을 해서 학원비를 받았어요. 그 돈으로 미용학원에 등록을 했죠.
Q: 커트 실력을 인정받아 승승장구 하셨다던데, 그만 두신 이유는?
커트 하나는 정말 자신이 있었어요. 제 입으로 말하긴 그렇지만 ‘커트를 잘하는 남자 미용사’로 그 지역에서 유명했어요. 밤이 되면 팁으로 주머니가 꽉 차서 더 이상 넣을 여유가 없을 정도였죠.
한 2년 정도 그렇게 생활을 했었는데 어느 날 원장님께서 이제 고데기나 파마도 해보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고데 하기를 원하시는 손님을 받긴 했는데 너무 못해서 욕을 한 바가지 얻어 먹었어요. 어린 나이에 그게 큰 상처가 되더라고요. 그래서 그만 두게 되었습니다.
Q: 가발 사업은 무슨 계기로?
A: 미용실을 그만두고 이발관에 가서 일을 하는데, 지인 분께서 혹시 ‘가발에 관심이 있으냐.’고 물어보시더라고요. 그 전부터 머리가 빠지기 시작해서 안 그래도 가발에 관심을 갖고 있던 차였죠. 당시 350만원을 주고 2일에 걸쳐 기술을 전수 받았어요.
그 다음부터 이발관과 가발 사업을 함께 했는데 워낙 가발이 돈이 되다 보니 이발에는 소홀해지더라고요. 그래서 이발관은 접고 본격적으로 가발 사업에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Q: 남다르게 홍보를 하셨다고요?
A: 명함을 좀 특이하게 만들었어요. 당시만 해도 명함에 사진을 넣는다는 상상 자체를 못할 때인데 저는 사진관에서 가발을 쓴 모습과 벗은 모습 둘 다 찍어 전후 사진을 명함에 넣었어요. 서울에 처음 올라왔을 때는 하루에 2000개씩 탈모 환자분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했죠.
아무래도 탈모라는 게 콤플렉스인 경우가 많아 그 동안 욕도 많이 얻어먹기도 하고, 뺨을 맞기도 하고 심지어는 협박을 받기도 했어요.
Q: 가발을 통해서 프랜차이즈를 운영하기도 하셨다고요?
A: 네. 가발 프랜차이즈를 만들려고 5명에게 무료로 기술을 전수해줬어요. 대신에 매장을 운영하면 우리 쪽에서 가발을 공급해준다는 조건이 깔려 있었죠. 처음 1, 2년은 아주 잘 되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이게 잘 안 지켜지더라고요. 일부러 가맹점을 닫고 기술만 전수해주면서 돈을 버시는 분들도 생기고, 다른 업체에서 싼 가발을 가져와 파는 경우도 있었어요.
Q: 가발로 특허도 받으셨다고요?
A: 저도 가발을 쓰는 입장이라 누구보다도 가발 쓰는 사람들을 잘 알고 이해해요. 핀으로 찌르면 아프고, 본드로 붙이면 피부에 안 좋고. 어떻게 하면 아프지도 않고 피부에 나쁘지도 않는 가발을 만들 수 있을까 고민했어요! 그 때 눈에 들어왔던 것이 찍찍이 운동화였죠. 특수 소재를 써서 머리카락과 마찰을 일으키면 핀이나 본드 없이 가발이 고정될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반응이 아주 좋아요.
Q: 앞으로의 계획은요?
A: 좀 거창한데 세계 1위의 가발 업체를 만드는 거예요. 대대로 이어가려고 지금 큰 아들이 저와 함께 사업을 운영하고 있고, 작은 아들은 타 가발 대기업에서
요즘은 저 같은 탈모인들 뿐만 아니라 보통 사람들도 즐겨 쓸 수 있는 패션 가발을 개발하고 있어요. 그리고 동시에 중국, 일본, 미국 등 전 세계에 진출하기 위해 준비 중에 있고요. 저희 회사의 가발 품질만은 세계 최고라고 자부합니다. 세계 1위의 가발 업체가 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