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달 초 새로 들어선 영국의 리즈 트러스 내각이 대규모 감세 정책을 내놓자 정부 부채 증가와 물가 상승을 우려가 커지며 파운드화가 폭락하고 국채 금리가 급등하는 금융시장 대혼란이 벌어졌다. [로이터 = 연합뉴스] |
새로 들어선 리즈 트러스 전 총리가 물가 상승으로 고통 받는 국민을 위해 세금을 깎아주겠다는 정책을 내놓은 게 발단이 됐습니다. 감세 정책이 발표되자 파운드화가 폭락하고 국채금리가 뛰면서 연기금의 파산설이 퍼졌습니다. 그 여파는 미국 등 세계로 번지면서 전세계 금융시장이 영국의 부도사태를 우려하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결국 영국의 중앙은행이 사태 해결에 뛰어들면서 일단 사태는 진정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쏟아진 물을 다시 주워담을 수는 없는 법입니다. 아마추어 내각이 저지른 불장난의 댓가인 이번 파운드화 폭락 사태를 함께 훑어보며 재정정책이 국가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그리고 이를 통해 설익은 포퓰리즘 정책이 국가 경제에 얼마나 큰 악영향을 줄 수 있는지를 함께 고민해보겠습니다.
우선 배경지식으로 영국 경제의 현재 상황을 짚어보겠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제 불안요인이라고 하면 가계부채, 일본은 정부부채, 중국은 기업부채 등을 꼽는데요. 영국 경제는 문제가 한둘이 아닙니다.
일단 무역 적자가 상당합니다. 영국은 만성 무역적자 국가입니다. 지난 2016년 영국이 EU를 탈퇴하는 브렉시트를 결정하고 EU와의 관세동맹은 2020년 말에 종료됐습니다. 브렉시트의 경제적 영향이 지난해부터 무역에 악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EU와 무관세는 유지되고 있지만 검역이나 서류작업이 복잡해지면서 물가 인상을 반영하지 않은 무역량은 코로나 이전인 2019년보다 현재가 더 적습니다. 여기에 에너지 가격 급등으로 에너지 수입액이 3배 넘게 증가하면서 무역적자가 대폭 확대됐습니다. 지난해 200억파운드(한화 약 32조2300억원)였던 에너지 무역적자는 올해 600억파운드(96조6900억원)로 급증하고 에너지를 제외한 무역적자 규모도 1800억파운드(290조원)에 달할 전망입니다.
영국의 국가부채도 심각한 수준입니다. 우리나라는 GDP 대비 국가부채가 50%선이라면서 나라빚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큰데요. 영국은 지난해 말 기준으로 130% 수준입니다. 재정건전성이 나빠진 이유는 단순합니다. 경기가 좋지 않아 걷히는 세금은 적은데 복지니 코로나 지원이니 하는 명목으로 정부가 너무 많은 돈을 쓴 탓입니다.
경상수지 적자와 재정수지 적자가 동시에 발생하는 것을 쌍둥이 적자라고 합니다. 이것만 해도 문제가 심각한데요. 물가 폭탄도 터졌습니다. 영국의 소비자물가지수(CPI) 상승률은 7월에 9.4%, 8월 10.1%, 9월 9.9%입니다. 7월 9.1%, 8월 8.5%, 9월 8.3%였던 미국보다 상황이 더 안 좋습니다. 지금 당장 영국의 최대 고민거리도 물가입니다. '난방이냐 빵이냐'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입니다.
날로 어두워져가는 전망 속에서 지난달 6일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 후임으로 리즈 트러스 전 총리가 등장해 새로운 내각을 꾸리게 됩니다. 트러스 전 총리는 선거 시절 당시 국민들의 에너지 가격 부담을 줄여주는 감세안을 첫번째 공약으로 내세웠습니다. 원래 난방비가 비싼 영국은 올해 들어 전기·가스요금이 70%나 올라 국민들의 고통이 극심합니다. 세금을 줄여서 그 고통을 덜어주겠다는 취지였습니다. 그리고 지난달 23일 리즈 트러스 전 총리가 5년간 매년 450억파운드(72조5000억원)의 세금을 깎아주고 올해 600억파운드(96조7000억원)의 에너지 보조금을 지급하는 내용이 담긴 감세정책이 발표하게 됩니다.
금융시장의 반응은 거의 '나라가 망했다' 수준이었습니다. 전날 달러당 1.1257파운드였던 환율이 감세안 발표 당일 1.0856파운드로, 3.5% 폭락했습니다. 다음날에도 장중 저점 기준으로 4.3%가 추가 폭락합니다. 우리나라로 따지면 1400원이던 환율이 이틀 만에 1510원 정도가 된 것이죠.
영국이 망하면 영국 국채를 산 사람들은 투자금을 다 날리게 됩니다. 그래서 시장에 영국 국채를 던지는 투자자가 늘면서 국채 가격이 폭락하고 금리는 급등하게 됩니다. 감세안 발표 직전 지난달 22일 3.4730%였던 영국 국채 3년물 금리는 27일엔 4.670%로 불과 닷새 만에 1%포인트 넘게 뜁니다. 4.67%의 금리가 어느 정도인지 감이 잘 안 오실텐데요. 유럽에서 보면 불가리아(3.768%)보다 나쁘고, 세르비아(5.900%)보다는 좋은 정도라고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경제정책에는 행정부가 세금을 통해 경기를 부양하거나 식히는 재정정책과, 중앙은행이 금리로 통화량을 조절하는 통화정책 두 가지가 있습니다. 당연히 재정정책과 통화정책은 같은 방향으로 움직여야 합니다. 영국의 중앙은행인 영란은행은 물가를 잡기 위해 두 번의 빅스텝(0.50%포인트) 인상을 단행해 기준금리를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최고 수준인 2.25%까지 올렸습니다. 그런데 감세를 하게 되면 국민들의 가처분 소득이 증가해 소비가 살아나면서 물가가 다시 오를 수 밖에 없습니다. 영란은행은 물가를 잡으려고 찬물을 붓는데 새 내각은 도로 뜨거운 물을 붓겠다고 나선 셈입니다. 금융시장의 히스테릭한 반응은 영국 정부의 재정 안정성과 영국 경제에 대한 불안감을 넘어 새 내각의 경제정책 운용 능력에 대한 불신이 반영된 결과라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더 큰 문제가 불거집니다. 영국 국채를 잔뜩 사들였던 영국의 연기금들이 파산 위기에 몰린 것입니다. 연기금의 파산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겪어본 은행, 보험사 등의 파산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입니다. 매달 나오는 연금으로 먹고 사는 영국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생계가 달린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제로 금리 시대가 되면서 영국 연기금들은 정상적인 투자로는 연금 지급이 힘들어지게 되자 빚을 내 더 많은 국채를 샀습니다. 100만원의 현금으로 영국 국채를 사고, 새로 매수한 국채를 담보로 또 100만원을 대출 받아 국채를 더 사는 식입니다. 100만원으로 200만원어치 국채를 사는 것이죠. 이를 부채연계투자(LDI)라고 합니다.
그런데 국채 가격이 떨어지면서 은행들이 담보금액이 대출금액보다 적어졌다며 추가 담보나 대출 상환을 요구하면서 연기금이 벼랑으로 몰린 것입니다. 연기금은 국채를 팔아 현금 마련에 나서게 되고 연기금이 보유한 장기 국채 급매물이 시장에 투하되면서 국채 가격의 폭락세가 더욱 심해지게 되고 가격 폭락이 또 투매를 유발하는 악순환이 벌어집니다.
↑ 감세안으로 촉발된 영국 국채 금리 급등으로 연기금이 파산 위기에 몰리자 영란은행이 장기 국채 매입에 나서며 급한 불을 껐다. 이 과정에서 풀린 유동성은 물가 상승을 더욱 자극할 것으로 우려된다. [EPA = 연합뉴스] |
영국 파운드화 폭락 사태의 여파는 글로벌로 번집니다. 영국 국가부도 사태가 올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에 '킹달러'가 '갓달러'로 거듭날 조짐을 보이고 뉴욕증시도 급락합니다. 국제통화기금(IMF)을 비롯해 미국 행정부 고위 관리들이 공개적으로 영국에게 "정책 혼선을 수정하라"라며 감세안 철회를 요구하게 됩니다.
보다못한 영란은행이 시장에 개입합니다. 지난달 28일 영란은행은 파운드화를 발행해 연기금이 보유한 장기 국채를 매입하겠다고 밝힙니다. 단 이 조치는 14일까지 시행된다면서 이번이 마지막 기회이고 그 이후에는 연기금이 알아서 하라는 메시지를 수차례 보냅니다.
영란은행이 돈을 찍어서 국채를 사들이면 시중에 통화량이 더 증가하게 됩니다. 이는 파운드화의 가치를 더 떨어뜨릴 수도 있는데요. 오히려 파운드화는 급반등합니다. '영란은행은 그래도 멀쩡하구나'라며 시장의 안도했기 때문입니다.
트러스 전 총리도 지난 3일과 14일 두 차례에 걸쳐 감세안의 핵심 내용들을 철회합니다. 감세안을 주도했던 영국 재무장관도 경질되는 등 현재 영국은 안정을 되찾아가고 있습니다. 외견상으론 그렇지만 사실 청구서가 아직 도착하지 않은 것일 뿐입니다. 영국은 내년 중반쯤에 기준금리가 6%를 넘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이번에 중앙은행의 국채 매입으로 통화량이 증가한 만큼 물가 상승 압력이 더 높아져 기준금리는 이보다 더 올라야 할 것입니다. 이미 지난 15일 영란은행 총재는 "예상보다 더 강한 통화정책 대응이 필요할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국민들이 더 큰 이자부담으로 댓가를 치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태를 초래한 트러스 전 총리는 사임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지난 20일 자리에서 물러났습니다. 그의 사임 소식에 파운드화와 런던 증시가 상승하고 국채 금리는 떨어지는 등 시장이 환호하는 모습은 오히려 씁쓸한 뒷맛을 남깁니다.
현재 상황을 즐기는 것은 영국 파운드화 급락에 베팅한 글로벌 헤지펀드 밖에 없는 듯 합니다. 이번 파운드화 폭락 사태로 영국 금융시장이 얼마나 취약한지가
[고득관 매경닷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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