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환위기 징후 분석 ◆
제로금리 고집으로 미국과 금리 차가 크게 벌어진 일본에서 외국인 자금이 가장 많이 빠져나갔다. 중국과의 외교 갈등과 반도체 전쟁 격화로 증시가 휘청인 대만에서도 외국인들의 탈출이 이어졌다. 한국은 상대적으로 선방했지만 미국과의 금리 차, 북한과의 지정학적 리스크에 노출돼 안심할 수 없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5일 블룸버그에 따르면 지난달 아시아 주요 8개국 증시 가운데 가장 많은 외국인 자금이 빠져나간 국가는 일본으로 175억2000만달러(약 24조7700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외국인 전체 유출 자금의 약 64%가 일본에서 빠져나간 셈이다.
일본 증시에서 대거 자금이 빠져나간 이유는 미국과의 금리 격차 때문이다. 미국이 지난 6월부터 9월까지 3연속 자이언트 스텝을 밟아 기준금리를 3.25%까지 올렸지만, 일본은 제로금리를 유지했다. 게다가 미국 연방준비제도가 연말까지 금리를 1.25%포인트 추가로 올릴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지만, 일본은행(BOJ)은 제로금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고 있다.
일본 증시에는 미국의 연이은 자이언트 스텝에도 지난 7월 외국인 자금이 순유입됐다. 금리 차를 좁힐 조짐이 전혀 보이지 않자 8월(-28억달러)에 이어 9월에는 대규모 자금이 일본 열도에서 빠져나갔다.
지난달에 대만 증시에서는 56억달러(약 7조9100억원)가 빠져나가 일본에 이어 외국인 순유출 2위를 기록했다. 시가총액 대비 유출 규모를 보면 일본에 비해 작다고 하기 어렵다. 일본 증시의 시총은 5조2941억달러(8월 기준)로 대만(1조5516억달러)의 3배 수준이다. 대만에서 외국인 자금이 빠져나간 것은 올해 초 우크라이나 전쟁이 시작된 이후부터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중국과 대만의 긴장 관계가 고조되자 외국인 자금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대만의 지정학적 리스크가 많이 부각되고 있는 점도 외국인 자금이 빠져나간 이유 중 하나다. 미·중 관계의 새로운 뇌관이 될 것이라는 평가를 받는 미국의 대만정책법(Taiwan Policy Act·TPA)이 지난달 미국 상원을 통과했다. 법안에는 대만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의 주요 동맹국으로 지정하는 내용을 비롯해 각종 국제기구와 다자무역협정에 참여할 수 있는 외교적 기회를 증진하는 조항이 포함됐고, 대만에 대한 중국의 위협과 관련해 중국을 제재하는 내용도 들어갔다. 지난 6월부터 보면 외국인의 대만에 대한 순매도액 합산은 180억달러에 달한다. 반도체 기술주가 많은 대만은 신흥 시장에서 외국인에게 가장 많이 노출된 증시로 꼽힌다.
김영환 NH투자증권 책임연구원은 "일본은 미국이 기준금리 인상을 단행하는 가운데 양적완화 정책을 지속 중인 국가이고, 대만은 미국의 대만정책법 제정과 관련해 직접적인 리스크가 있는 국가"라며 "한국은 글로벌 정치·경제 상황의 영향권에서는 일본과 대만보다 상대적으로 떨어져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고 말했다.
한국은 지난달 19억달러(약 2조6800억원)가 빠져나가 아시아 주요국 중 세 번째에 올랐다.
하지만 한국은 미국과의 금리 차, 북한과의 지정학적 리스크 같은 돌발 변수가 튀어나올 가능성이 있어 안심할 수 없다는 지적이다. 한국은 주요 국가 가운데 국내총생산(GDP) 대비 가계부채 비중이 가장 높기 때문에 미국의 금리 인상 속도를 따라가는 데 어려움이 있다. 한미 간 기준금리 역전은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또 한국은 북한 등 지정학적 리스크도 상존한다. 지난 4일 북한이 탄도미사일을 발사해 5년 만에 일본 열도를 통과해 태평양에 떨어뜨리기도 했다. 백석현 신한은행 이코노미스트는 "40년 만에 인플레이션이 도래하면서 연준을 포함한 글로벌 중앙은행들이 지금처럼 갑자기 공격적으로 변할 수 있다"며 "거시 경제나 지정학적 이슈에 대한 시장을 예측하고 대응하려는 생각을 버리고 리스크를 줄이는 데 집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대외의존도가 높은 한국 경제구조의 특성상 글로벌 경기 침체가 우려되는 현재 상황이 한국 주식시장에 부정적인 것은 사실이다. 실제로 9월 한 달간 한국 코스피는 10.8%, 대만 자취엔은 9.3%, 일본 닛케이225지수는 6.2% 하락하는 데 그쳤다.
한국 증시가 경기에 민감한 반도체 비중이 큰 점도 안심할 수 없는 대목이다. 한국 삼성전자와 대만 TSMC는 모두 미국 현지에 반도체 공장을 지으라는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영향권에 놓인다. 증권가는 반도체 밸류체인 전체가 경기 침체의 영향을 받지만 특히 메모리(삼성전자), 팹리스 및 전자부품 분야가 파운드리(TSMC), 후공정 분야보다 더 피해를 받을 것으로 보고 있다. 다만 대만 증시는 TSMC(시총 3571
한편 나머지 아시아 국가에서 인도 증시가 9월 외국인 순매도액이 9억6000만달러로 큰 편이고, 이어 태국(6억1000만달러), 말레이시아(3억3000만달러), 필리핀(1억9000만달러), 베트남(1억1000만달러) 순으로 나타났다.
[박윤예 기자][ⓒ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