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건설업 옥죄는 중대재해법 (上) ◆
내년 1월 27일 시행을 앞둔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중대재해법)이 한국 건설사들의 해외 진출을 막는 걸림돌이 될 전망이다. 해외 현장에서 한국인 직원이 사고를 당할 경우에도 국내 본사의 최고경영자(CEO)가 처벌받기 때문이다.
8일 건설업계에 따르면 해외 사업장이 많은 대형 건설사들을 중심으로 해외에서 근무하는 직원들을 최소화하거나 복귀시키려는 움직임이 확산하고 있다. 사고가 나면 경영진을 처벌하겠다는 법이 명분과 달리 한국인 직원들의 해외 진출을 막고 일자리를 외국인에게 넘겨주는 결과로 귀착되는 셈이다.
해외 수주 실적 최상위권의 대형 건설사 A사는 최근 내부 검토를 거쳐 해외 건설 현장에 파견 가는 한국인 직원 수를 최대한 줄이기로 결정했다. 내년부터는 본사 직원은 물론 함께 해외로 파견 보내는 국내 협력사 직원들 규모도 대폭 축소할 계획이다. 그동안 한국인 직원들이 맡던 해외 건설 현장 관리 업무는 다른 국적의 외국인들이 대체하게 될 전망이다. A사 관계자는 "내년부터 시행되는 중대재해법의 처벌을 피하기 위해서는 위험 부담을 최소화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대형 건설사 B사 역시 해외에서 근무하는 한국인 직원 수를 최소화하기 위한 계획을 마련 중이다. B사 관계자는 "법무팀에서 분석한 결과 해외 사업장의 한국인 사고도 중대재해법이 정한 CEO 처벌 이유가 될 수 있다는 해석이 내려졌다"고 말했다.
해외서 사고 나도 CEO 처벌…한국인 인력 줄이는 건설사
기존 산업안전보건법과 달리
중대재해법은 해외서도 적용
가뜩이나 힘든 업계엔 큰 악재
한국인 철수땐 현장관리 부실
공사품질 떨어지고 공기 지연
韓건설 경쟁력 약화로 이어져
하도급社 일자리도 타격 클듯
중대재해법이 시행되면 해외 현장에서 발생하는 사고도 국내 법인의 경영책임자가 책임져야 한다는 법조계 해석이 나오면서 건설업계가 바짝 긴장하고 있다. 업계 관계자들은 "단순히 CEO 처벌 자체보다 이로 인해 파생되는 해외 진출 축소와 관련 일자리 축소가 더 큰 문제"라고 입을 모았다.
8일 법조계에 따르면 내년 1월 중대재해법이 발효되면 한국 건설사들의 해외 현장에서 발생한 재해에 대해서도 한국 본사가 책임을 지게 된다. 중대재해법은 이미 올해 1월 법률이 공포됐고 현재 시행령이 입법예고 중이다. 중대재해처벌법 제4조·5조 등에는 '사업주 또는 경영책임자가 사업장 종사자의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 재해 예방에 필요한 인력·예산 등에 관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으며 제6조 등에는 '제4조 또는 제5조를 위반해 중대산업재해에 이르게 한 사업주 또는 경영책임자 등은 1년 이상의 징역 또는 10억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고 정하고 있다.
현재는 해외 건설 현장의 사고에 대해선 국내법인 '산업안전보건법'이 적용되지 않는 것과 비교하면 상황이 크게 달라지는 셈이다. 법무법인 바른의 박성근 변호사는 "해외 법인이 별도로 세워져 있는 경우라면 모를까 ○○건설의 해외사업본부가 공사를 하던 중 한국 직원이 사고를 당하면 당연히 본사 CEO의 책임"이라고 설명했다. 박 변호사는 "실제 해외 현장에 얼마만큼의 안전 시스템을 갖췄는지 다퉈볼 여지는 있지만 현행 규정으로는 일단 사고가 발생하면 CEO가 수사기관의 수사 대상이 되는 건 분명해 보인다"고 말했다.
B건설사 법무팀 소속 변호사는 "우리나라의 처벌 법규는 기본적으로 한국인이 해외에서 일으킨 범죄도 처벌할 수 있도록 돼 있다"며 "중대재해법에 내국인 국외범을 처벌하지 않는다는 예외 규정이 없는 것으로 볼 때 중대재해법을 해외 건설 현장 사고에도 적용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중대재해법으로 한국 직원들이 철수할 경우 가장 큰 문제는 해외 건설 현장 관리가 어려워진다는 점이다. C건설사 관계자는 "큰 현장의 경우 1000명 가까운 현지 작업자들을 관리해야 한다"며 "파견된 한국인 직원들이 철수하면 본사와 의사소통이 잘 되지 않아 한국 건설업체 특유의 효율적인 현장 관리가 어려워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로 인해 공사 품질이 떨어지거나 공기가 늘어날 가능성도 높다.
이는 한국 건설업체들의 경쟁력 약화로 이어질 수 있다. 그동안 한국 건설업체들이 중동·아시아 등지에서 경쟁력을 가질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뛰어난 품질관리와 어떤 경우에도 약속한 공기를 맞춰내는 성실함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인 직원들이 현장을 직접 관리하지 못할 경우 이 같은 강점이 희석될 것이며 이는 결국 국내 건설사들의 해외 수주를 줄어들게 만드는 요인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는 가뜩이나 해외에서 대형 토목사업 축소, 중국 건설사의 저가 공세 등에 시달리고 있는 건설사들 입장에서는 큰 악재다. 해외건설협회가 관리하는 해외건설종합정보서비스 자료에 따르면 올해 1월 1일부터 9월 7일까지 한국 건설사들의 2021년 해외 수주액은 162억8166만달러로 지난해 같은 기간 수주액 178억5696만달러에 비해 9%가량 하락했다. 수주 건수 역시 지난해 367건에서 올해 322건으로 12% 줄었다.
대형 건설사들의 올해 해외 수주 목표 대비 수주 실적도 좋지 않다. 상반기 기준 현대건설은 올해 목표 수주액의 34.6%를 달성했고 대우건설(28.9%), GS건설(11.0%) 등도 기대에 못 미치는 수주 실적을 기록했다. D건설사 대표는 "내년부터 한국인 직원들이 해외 현장에서 철수하기 시작하면 건설사들의 해외 진출은 더 위축될 가능성이 크다"고 우려했다.
해외 수주가 줄어들면 관련 일자리도 자연스레 감소할 전망이다. 이복남 서울대 건설환경종합연구소 교수는 "해외 현장에서 사고가 나면 현지 당국에 의해 입찰제한 등 강력한 제재를 받기 때문에 국내법까지 적용하면 이중처벌이 된다"며 "건설사들이 한국 인력을 철수시키면 해외 수주가 줄어드는 건 물론이고 이로 인해 한국 젊은이들의 일자리도 줄어들 것"이라고 우려했다.
한상준 대한건설협회 부장은 "건설사가 해외 공사를 수주하면 특정 공법을 보유했거나 그 분야의 전문성을 갖춘 국내 하도급사와 함께 진출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중대재해처벌법이 시행되면 국내 하도급사와 함께 진출하는 것은 생각하기 어려울 것"이라며 "하도급사들의 일자리가 먼저 줄어들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이 같은 건설업계의 우려에 정부는 "아직 확정된 것은 없다"는 입장이다. 주무부처인 법무부에 따르면 중대재해법 시행령은 지난달 23일까지 입법예고를 마치고 입법예고 기간 중 접수된 다양한 의견을 시행령에 반영할지를 검토하는 단계다.
이에 대해 고용노동부 관계자는 "아직 시행령이 확정·공표되지 않았기 때문에 해외 사업장의 한국인 사망사고 발생 시 중대재해법 적용을 할 수 있을지, 이를 통해 국내 본사 CEO 처벌이 가능할지 등을 결정하기엔 시기상조"라고 선을 그었다. 그
국토교통부도 "건설사들이 우려하는 사항들에 대해 여러 경로를 통해 듣고 있다"며 "법 시행 후 법령 해석 과정에서도 여러 견해가 나올 수 있어 지금 섣불리 언급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김동은 기자][ⓒ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