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중국 사이버 활동 제재에 나선 가운데 중국이 뉴욕증시에 상장한 자국 기업 상장 폐지를 강제하기 위해 관련 규정 보완 작업에 들어갔다는 소식이 나왔다. 지난 10일 중국 당국이 자국 인터넷 기업의 해외증시 상장 제한 규제를 발표하면서 상장 리스크가 불거진 데 이어 이번에는 기존 상장 기업 상장 폐지 리스크가 불거진 셈이다. 미·중 패권 갈등이 반도체 산업뿐 아니라 증시로 번지면서 '중국 내수 시장의 높은 성장성'을 기대하고 알리바바·디디추싱 등 중국 정보기술(IT)기업 주식을 사들여온 개인 투자자들도 새삼 '차이나 리스크'를 저울질 하는 분위기다.
미·중 갈등골이 깊어지면서 아시아 주요국 증시가 하락세로 출발한 19일(현지시간) 오전, 홍콩증시에서는 중국 기술주가 일제히 급락해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보여줬다. 이날 홍콩증시 오전 장에서 '중국 IT공룡'으로 꼽히는 대형 온라인 상거래 업체 메이퇀 디엔핑과 '중국판 구글' 바이두가 각각 -5%, -4%대 낙폭을 기록했다. '중국판 아마존'을 꿈꾸는 알리바바와 징둥닷컴, 텐센트도 3% 넘는 하락세를 기록했고 '중국 반도체 굴기'를 상징하는 중국 최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기업인 SMIC 주가는 5% 가까이 급락했다.
중국 IT 업체들 주가 하락은 중국 당국이 '해외증시 상장기업 상장 폐지' 관련 규정을 준비 중이라는 소식이 전해진 영향이고, 중국 국영 파운드리 업체 SMIC 의 경우는 미·중 반도체 갈등이 불거진 탓이다. 주말인 17일에는 미국 조 바이든 정부가 네덜란드 정부를 향해 반도체 생산 핵심장비인 네덜란드 ASML사의 첨단 극자외선(EUV) 노광장비를 중국 기업에 팔지 못하도록 재차 요청했다는 외신 보도가 전해진 바 있다.
이어 19일 블룸버그 통신은 중국 당국이 해외 증시에 상장한 자국 기업 상장 폐지 관련 규정을 보완하고 있으며 앞으로 1~2개월 안에 윤곽이 드러날 것이라고 사안에 정통한 관계자들을 인용해 전했다. 이와 관련해 베이징대 광후아 경영 대학원의 폴 길리스 교수는 "이대로라면 앞으로 5~10년 안에 미국 증시에 상장한 중국 기업이 없어질 것"이라면서 "뉴욕증시에선 중복 상장한 소수의 중국 대기업 주식 정도만 존재할 것으로 보인다"고 전망했다. 중복 상장이란 두 곳 이상의 증시에 상장된 경우를 말한다. 홍콩증시와 뉴욕증시에 상장된 중국 알리바바(뉴욕증시 종목 코드 BABA)나 징둥닷컴(JD), 샤오펑(XPEV)이 대표적이다.
중국 기업 상장 폐지 관련 규정 개정 작업 핵심은 중국 IT기업의 '변동 지분 법인'(VIE)을 손 보는 작업일 것으로 보인다. VIE는 중국 기업들이 IT 등 특정산업에 대한 중국 당국의 외국 자본 규제를 피하는 대표적인 수단이다. 또 중국 본토 증시에서보다 좋은 조건으로 해외 증시에 상장할 수 있는 통로로도 통한다. VIE는 기업 지배구조 유형 중 하나다. 회사 소유자가 자신이 지분 100%를 가진 지주 회사를 해외에 설립한 후, 이 지주 회사 명의로 100% 지분을 보유한 외국 자본 법인(WOFE)을 중국에 설립하는 식으로 운영되는 경영 구조를 뜻한다. 마윈이 세운 알리바바그룹은 케이먼 제도에 알리바바 홀딩스를 세운 후 중국 내 법인을 통해 타오바오와 티몰 등을 운영했고, 이어 2014년 9월 뉴욕증권거래소에서 당시 '최대 규모 기업공모(IPO)'를 통해 상장한 바 있다.
중국은 이전에도 자국 기업 상장 폐지를 미국과의 갈등 구도에 활용해왔다. 중국의 기술 훔지기 관행을 문제 감은 미국이 '중국 반도체 굴기' 견제에 나섰던 지난 2019년 5월, '중국 최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업체이자 국영기업은 SMIC는 나스닥증권거래소에서 자진 상장 폐지한 후 지난 해 7월 상하이 스타마켓(커촹반)에 상장한 바 있다.
중국의 행보는 '글로벌 증시 심장부'뉴욕증시와 기축통화인 미국 달러화로 대표되는 자본시장 패권까지 의식한 조치다. 상하이 스타마켓은 중국 공산당 지도부가 '중국판 나스닥'을 표방하며 2019년 발족시킨 증권거래소다. 자국 기술 기업을 뉴욕증시가 아닌 중국 본토 증시에 뜰어들이기 위해 빠른 시일 내 데뷔해 자금을 끌어모을 수 있도록 상장 절차를 간소화 하는 등 적극 지원해왔다.
중국 당국은 최근 자국 기업에 대해 '홍콩 증시 상장 인센티브' 방안을 마련하는 등 본격적으로 뉴욕증시 견제에 나선 상태다. 이달 10일 중국 국가인터넷정보판공실은 '인터넷안보심사방법(규정) 개정안'공개를 통해 "회원 100만명 이상인 인터넷 서비스를 운영하는 기업이 해외 증시에 상장하는 경우 반드시 당국으로부터 사이버 안보 심사를 받아야 한다"는 해외증시 상장 규제를 발표한 바 있다. 이후 홍콩증시에 대해서는 이런 사이버 안보 심사 의무를 면제한다고 밝혔다. 자국 기술기업들이 뉴욕증시가 아닌 홍콩증시로 향하도록 유도하겠다는 계산에서다.
공산당 지도부 특유의 정책 불확실성으로 대표되는 '차이나 리스크'가 신규 상장이 아닌 기존 상장 기업으로 번지면서 개인 투자자들의 셈법도 복잡해졌다. 중국이 '세계 제2위 경제 규모'와 동시에 '세계 최대 소비시장'임을 감안할 때 중국 기술 기업 성장성을 높게 본 개인 투자자들이 주로 뉴욕증시에 상장된 중국 기술수를 매수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홍콩·중국 본토 증시에는 중국 기업 주식을 살 때 최소한 100주 이상 매수해야 한다는 '최소 거래단위' 규칙 등 번거로운 규정이 있는 반면 뉴욕증시에선 이런 제한이 없어 거래가 자유롭다.
블룸버그 통신은 미·중 갈등이 뉴욕증시에서 본격화되는 경우 월가 대형 투자 은행(IB)들도 부정적인 영향을 받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JP모건과 모건스탠리, 골드만삭스, 뱅크오브아메리카 등 대형 IB들이 중국 기업 IPO 주관사로 나서 적지 않은 수수료 수입을 올려왔다는 이유에서다. 현재 뉴욕증시 상장을 준비·검토 중인 중국 기업은 수백여 곳으로 기업 가치가 도합 2조달러 규모로 추정된다. 올해 1~7월 현재까지 중국 기업들이 뉴욕증시 상장을 통해 끌어모은 자금은 130억달러(약15조원)다.
뉴욕증시에 상장된 중국 기술주도 가파른 낙폭을 그어왔다. '중국판 아마존' 알리바바는 지난 해 11월 초 이후 주가가 33% 가까이 폭락했다. 지난해 11월 2일은 중국 금융 당국이 알라바바의 핀테크 자회사 '엔트 그룹' 상하이·홍콩 증시 상장을 무기한 연기 시켰다는 소식이 전해진 때다. 당시 창업자 마윈이 중국 금융 규제를 비판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미움을 샀다. 이어 IT기업 반(反)독점 규제도 더해지면서 올해 들어서만(1월 4일~7월 16일 기준) -6.91% 낙폭을 그었다.
알리바바 경쟁사로 나스닥증권거래소에 중복 상장된 중국 징둥닷컴(JD)도 'IT기업 반독점 규제' 여파로 올해 1월 이후 -12.44% 하락한 상태다. 뉴욕증권거래소에 상장된 '중국 비디오 게임 방송 스트리밍 플랫폼' 후야(HUYA)는 올해 주가가 -25.34%나 떨어졌다. 중국 당국이 자국 IT대 기업 텐센트의 후야 인수에 제동을 건 탓이다. '중국판 구글' 바이두(BIDU)와 '중국판 마켓컬리' 다다넥서스(DADA)도 올해 각각 -17.17%, -32.76% 낙폭을 그었다. 최근 중국 당국의 '자국 기업 해외 증시 상장 규제' 움직임 한 가운데 섰던 디디 추싱은 지난 6월 30일 상장 이후 보름 여 만에 -15.35% 급락했다.
중국은 1949년 공산주의 혁명 이후 40여년 간 증시를 걸어 잠궜다. 이후 1990년대 증시 문을 다시 열었고 현대화 조치를 통해 2009년 본토 선전 증시에 '나스닥 스타일'의 차이넥스트(촹예반)를 가동하기 시작했다.
중국 자본 시장 개방 움직임은 시 주석 집권이 본격화된 2013년 이후 물살을 탔다. 외국인 투자자들이 홍콩증시를 통해 본토 증시에 상장된 중국 기업 주식을 직접 매수할 수 있게 됐고, 중국 기업이 뉴욕증시에 상장할 경우 예외적으로 유리한 환경이 만들어졌다. 대표적인 것이 미국 상장회사회계감독위원회(PCAOB)와 중국 증권감독관리위원회(CSRC)가 체결한 회계관련 양해각서(MOU)다. 뉴욕증시에 상장하는 중국 기업이 미국 회계 기준이 아닌 자국 기준에 따르더라도 이를 용인한다는 내용이다.
다만 2017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집권한 것을 전후해 미·중 갈등이 전방위로 불거졌다. 연장 선상에서 중국 금융 당국은 2019년 상하이에 또 다른 '나스닥 스타일 거래소' 스타보드를 열면서 미·중 갈등 한 가운데 선 반도체 등 자국 기술 기업 상장을 유도하기 시작했다.
미국도 지난 해 정부와 연방 의회가 나서서 뉴욕증시
[김인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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