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디지털 화폐 전쟁 ◆
크리스틴 라가르드 ECB 총재는 14일(현지시간) "디지털 유로화에 대한 보고서를 발표한 지 9개월이 됐다"며 "그동안 시민·전문가들과 협업으로 (디지털화폐 도입에 관한) 연구를 했다. 그 결과, 디지털 유로화 프로젝트를 시작하겠다는 결정을 하게 됐다"고 밝혔다. 라가르드 총재는 또 "우리의 목표는 디지털 시대에 시민과 기업이 가장 안전한 형태의 통화인 중앙은행 통화에 계속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사실상 가상화폐를 겨냥한 것이다. 가상화폐와 비교해 중앙은행의 감시·감독이 가능한 디지털 유로화의 특성을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ECB는 디지털 유로화를 환경 친화적으로 설계할 것이라는 점도 밝혔는데, 이 역시 전력낭비 문제가 제기된 가상화폐의 결함을 부각한 것으로 해석된다.
당장 디지털 유로화가 도입되는 것은 아니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ECB의 준비 기간은 2년이다. 2년 동안 디지털 유로화에 대한 설계와 유통에 관한 문제를 논의할 예정이다. 은행과 소비자 등 수많은 이해 당사자 간 논의가 필요한 데다 유관 기관과 함께 새로 정립될 디지털 유로화에 대한 법률 작업에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이다.
ECB는 디지털 유로가 현금을 보완하는 것이지,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는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현금을 아예 없애고 디지털 거래만 인정할 경우 과점이 진행돼 수수료가 높아질 수 있고, 개인정보 유출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미국 거대 정보기술(IT) 기업에 의한 금융 서비스의 지배에 대한 경계도 높다. 국제 금융의 혼란을 피하기 위해 유로 지역 이외에서의 디지털 유로 소유에 제한을 둘 전망이다.
디지털 유로화가 도입되면 상업은행들이 지금보다 불리한 환경에 놓일 것이라는 우려도 있다.
기존 고객들이 위기 상황에서 예금을 상업은행보다 더 안전하다고 인식되는 ECB로 옮기려 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즉, '디지털 뱅크런'이다. 이 같은 위험성을 인식해 파비오 파네타 ECB 이사는 개인이 보유할 수 있는 디지털 유로의 한도를 3000유로로 제한하거나, 대규모 보유를 억제하기 위한 마이너스 금리를 제안했다고 블룸버그는 전했다.
하지만 이러한 걱정은 기우라는 의견도 있다. ECB는 디지털 지갑 서비스를 제공할 은행과 핀테크 회사의 역할도 정의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ECB가 수억 명의 고객과 직접 거래하는 것을 피하고 싶다는 신호를 내비친 셈이다. 아울러 디지털 유로화 도입으로 ECB가 현금을 직접 소비자에게 지급할 수 있게 돼 각종 지원금 지급이 더 수월해질 수 있다고 블룸버그는 전망했다.
CBDC 도입 논의는 유럽뿐 아니라 세계 각국에서 진행되고 있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중국과 인도, 파키스탄, 남아프리카공화국이 CBDC 도입을 공식화했다. 미국과 호주, 노르웨이, 일본도 CBDC 도입 연구를 진행 중이다.
같은 날 제롬 파월 미국 연방준비제도(Fed) 의장은 미국 하원 금융서비스위원회에 출석한 자리에서 "연준은 디지털 연구에 대한 광범위한 조사를 거쳐 9월 초 CBDC 연구 보고서를 공개할 것"이라고 말했다.
파월 의장의 이번 발언으로 미국에서도 CBDC 도입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중국이 디지털 위안화 도입에 속도를 내면서 연준도 '디지털 달러' 도입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것이다. CBDC를 둔 세계 각국 경쟁이 뜨거워지자 이를 진정시켜야 한다는 여론도 일고 있다. 국제결제은행(BIS)과 국제통화기금(IMF), 세계은행 등 세계 3대 금융기관이 지난 9일 효율적인 기술 통합을 기반으로 하는 중앙은행 CBDC의 국경 간 네트워크를 제안했다. 3개 글로벌 금융기관은 공동 연구를 통해 "중앙은행 발행 CBDC를 특정 국가 안에서 활용하는 것보다 국경 간 활용에 더
이들 금융기관은 보고서를 통해 "CBDC의 영향력이 국경을 초월하는데도 각국 중앙은행들이 국내 문제에 집중하고 있다"며 "글로벌 CBDC 활용은 자금세탁방지(AML) 및 테러자금조달(CFT) 방지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덕식 기자][ⓒ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