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디지털화폐 전쟁 ◆
전문가들은 "전 세계 디지털화폐 패권 전쟁에서 한국만 소외되고 나아가 국내 통화정책 주도권까지 중국 등에 빼앗기는 부작용(디지털 달러라이제이션·Digital Dollarization)이 나타날 수 있다"며 한국형 CBDC 도입을 서두를 것을 촉구했다. 중국이 CBDC 시장을 주도하고 우리가 중국 주도 CBDC에 포함될 경우 디지털화폐 문제는 경제적 문제를 넘어서 국제 외교 문제로까지 비화될 가능성도 제기된다.
3일 금융업계에 따르면 한은은 CBDC 파일럿 시스템 구축을 위한 컨설팅을 진행하고 있다. 파일럿 시스템을 구축해 가상 환경에서 CBDC가 작동하는 방식과 안전성 등을 테스트해 볼 계획이다. 다만 한은 관계자는 "한은이 구축하는 파일럿 시스템은 CBDC 실제 도입을 전제로 하는 중국 스웨덴 등의 파일럿 시스템과 다른 개념"이라며 "미래에 현금 없는 사회가 올 것에 대비해 모의실험 겸 연구를 진행하는 것으로 CBDC 도입은 논의하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국내 지급결제 시스템이나 금융 포용 수준을 감안하면 CBDC 도입이 반드시 필요한지 의구심이 든다"고 덧붙였다.
권혁준 순천향대 교수는 "남들은 디지털 화폐를 도입하고 새로운 시장을 개척해가는데 한국만 '큰 불편이 없다'고 현금 거래와 신용카드 결제에 머무를 순 없는 일"이라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특히 다른 나라 디지털화폐가 국내 시장에서 널리 통용됨에 따라 한은의 통화 정책 효과가 떨어지고 중국 등 다른 국가 통화정책의 영향을 받게 되는 디지털 달러라이제이션을 우려하고 있다.
달러라이제이션이란 미국 달러화 같은 다른 나라 화폐가 자국 통화와 함께 공식 화폐로 사용되거나 자국 통화를 대체하는 현상을 일컫는 경제용어다. 심각한 인플레이션이나 외환위기를 겪은 일부 개발도상국에서 나타난 현상으로 달러라이제이션이 나타난 국가는 통화 주권을 상실하고 결국 다른 국가에 경제적으로 예속됐다. 중국이 디지털화폐를 주도할 경우 우리나라가 중국에 예속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지적이다.
국제결제은행(BIS)이 2020년 4분기 65개국 중앙은행을 대상으로 CBDC 준비 상태와 발행 동기 등을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중앙은행의 85%가 CBDC를 발행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거나 최소한 발행 타당성·적용 기술에 대한 연구를 진행 중인 것으로 나타났다. 다른 국가의 CBDC가 국내에 유입돼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자국 통화 이용 비중이 줄어들 수 있다는 점을 염려하는 것이다. 통화가치가 안정적인 선진국들조차 이런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을 걱정한다는 점에 주목할 만하다.
최근 고려대 미래성장연구소가 주최한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 동향과 한국의 CBDC 도입 방안·과제' 세미나에서 현정환 동국대 교수는 "CBDC는 먼저 승기를 잡는 쪽이 시장을 독차지하게 되는 구조"라며 "중국 등 주요 국가가 CBDC를 발행할 경우 한국 시장 내 사용 비중이 높아질 뿐만 아니라 이들을 안전 자산으로 확보하려는 국내 수요까지 늘어날 수 있다"고 말했다.
현 교수는 "지금도 기업들이 수출로 벌어들인 돈 가운데 일부는 외화로 비축하려 하고 개인들의 외화 예금도 꾸준히 늘고 있다"며 "디지털 형태로 간편하게 소지할 수 있다면 외화 수요는 지금보다
이에 대해 한은 관계자는 "과거 달러라이제이션은 경제가 망가지고 자국 통화 가치가 급락한 일부 국가에서 나타난 현상"이라며 "정보기술(IT) 발전이 촉매가 될 순 있지만 지금으로선 디지털 달러라이제이션이 큰 위협이라고 보지 않는다"고 반박했다.
[김혜순 기자][ⓒ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