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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1973년 덕수상고를 졸업한 후 처음 발을 디딘 곳은 외환은행이다. 사회 초년생부터 자본시장 경험을 쌓았다. 이후 주경야독해 행정고시(21회)에 합격하면서 다루는 돈의 '단위'가 달라졌다. 기획예산처에서 차관까지 지낸 예산통으로 연간 수백조 원에 달하는 나랏돈을 만졌다.
30년 공직생활을 접고 서강대에서 기술경영전문대학원장을 맡으면서 돈 되는 기술을 발굴하는 멘토 역할로 변신하기도 했다.
그랬던 그가 돈과 기술을 좇아 이번에는 돈 찍어내는 조폐공사 키를 잡았다. 지난 2월 조폐공사 사장에 취임한 그를 최근 서울 마포구 조폐공사 서울사옥에서 만났다.
반 사장은 "조폐공사는 돈만 만드는 곳이 아니다"고 운을 뗐다. 1951년 돈 찍어내는 목적으로 조직이 설립됐지만 70년이 지난 지금은 사회적 신뢰가 필요한 길목마다 제 역할을 하고 있는 기업으로 변모하고 있다는 얘기다. 그는 "조폐공사는 지폐, 동전, 주민등록증이나 여권 등 절대 가짜가 있으면 안 되는 제품을 만드는 곳"이라며 "지난 70년간 축적된 이 같은 위·변조 방지 기술을 활용해 차세대 전자여권, 사물인터넷(IoT) 보안 모듈 등 정품 인증 사업을 활발히 전개해 가고 있다"고 말했다.
조폐공사가 역점을 기울이고 있는 보안 모듈 사업이 대표적인 새 먹거리다. 현재 조폐공사가 만든 보안 모듈은 주유소 계량기에 투입돼 주유량 계측 위·변조를 막는 데 사용된다. 주유소 업자가 임의로 계량기를 조작할 수 없도록 세부 기록이 모두 저장되는 일종의 블랙박스를 심어 소비자들이 부당한 피해를 보지 않도록 하고 있다.
반 사장은 "앞으로 보안 사업을 대대적으로 확대한다"며 "한국전력과 협의해 주유소 보안 모듈을 전기차 충전기 시장으로 넓히고 전기, 수도 원격검침용 스마트미터(계량기) 설치에 나서는 등 고부가가치 IoT 부문을 개척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의류나 화장품 등 소비재 '짝퉁(가짜상품)'을 막는 사업도 추진 중이다. 조폐공사는 서울 동대문 패션타운관광특구협의회와 손잡고 위·변조 방지 기술이 들어간 의류 라벨을 공급하고 있다. 부산시와도 협력해 지역에서 만든 신발에 위·변조 방지 라벨을 달아 판매하고 있다. 라벨에 QR코드 등을 심어 스마트폰으로 정품 여부를 즉각 확인할 수 있도록 한 것으로, 중국산 저가 제품에 가짜 라벨을 달아 파는 행태를 차단하는 데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앞으로는 보안·정품 인증 사업을 더욱 고도화한다. 정품 인증 사업이 다른 소비재로 매출처를 넓힐 수 있는 여지가 무궁무진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자원재활용법 개정으로 내년 6월부터 시행되는 일회용 컵 보증금 제도에 대비한 먹거리도 준비하고 있다. 앞으로 카페에서 일회용 컵을 사용하면 보증금을 내고 컵을 반납하면 이 돈을 돌려받게 된다. 가짜 컵을 주고 보증금을 돌려받는 상황을 막기 위해 한국순환자원유통지원센터와 협력해 일회용 컵 위·변조 방지 기술 개발에 나섰다.
반 사장은 "블록체인 기반 보안 플랫폼을 개발한 상태"라며 "전자문서 위·변조를 방지하거나 모바일 인증을 통해 설문조사나 투표를 하는 시스템 서비스도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디지털 시대에 맞춰 정보통신기술(ICT)을 활용한 디지털 신분증(ID) 사업에도 나선다. 조폐공사는 당장 올해 안에 첨단 보안 요소를 추가한 차세대 여권과 모바일 운전면허증을 선보인다는 방침이다.
그는 "현재 정품 인증 사업 매출을 3년 안에 5배 이상 늘린다는 계획"이라며 "민간 부문과 손잡고 자회사를 만들어 인증 사업을 추진하는 방안도 고민 중"이라고 전했다.
올해 말 한국은행이 시범적으로 추진하는 디지털화폐(CBDC)와 관련해 내부 대비에도 들어갔다. 그는 "조폐공사는 지방자치단체가 발행하는 모바일 지역상품권을 QR코드를 통해 결제하는 시스템을 운용하고 있다"며 "일종의 모바일화폐 구축 경험을 갖고 있는 것인데 한은과 긴밀히 협력해 CBDC 도입에도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역설했다.
조폐공사가 고부가가치 사업 발굴에 나선 것은 화폐, 상품권 발행 등 사업만으로 성장하는 데 한계에 봉착했기 때문이다. 조폐공사는 지난해 5317억원의 사상 최대 매출액을 기록했지만 코로나19 여파로 여권 발급 등이 급감하자 142억원의 영업 적자를 냈다.
영업이익 확대가 시급해진 상황에서 반 사장이 '구원 투수'로 조폐공사 키를 잡은 셈이다. 그는 "경제·사회 부문에서 급격한 변화가 오면서 발 빠르게 미래 성장동력 발굴에 나서야 하는 상황"이라며 "최근 비상경영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해 사업 고도화, 기술 개발, 투자 조정 등 경영 합리화에도 나서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5만원권에 들어가는 위·변조 방지 기술만 해도 22가지나 되고, 조폐공사가 등록한 관련 지식재산권만 900건"이라며 "한국의 조폐 경쟁력은 이미 세계 최고 수준으로 이제 이 같은 기술력을 신뢰 사회를 구축하는 데 쏟아야 한다"고 설명했다.
최근 최대 고민을 물었더니 뜻밖에 '여권 대란'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는 "조폐공사에서 여권 발행 실무도 맡고 있다"면서 "백신 보급으로 코로나19 사태가 안정되면 내년에는 여권 기간 만료 물량과 맞물려 해외 여행, 출장 등으로 여권 발급 수요가 1000만명에 달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조폐공사 측은 내년 물량 폭탄에 대비해 생산량을 끌어올릴 복안 마련에 나섰지만 당장 1년 안에 생산량을 급격히 끌어올릴 방법이 마땅치 않아 고심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여권 제작은 외교부가 다음날 발급해야 할 물량을 조폐공사에 통보하면 공사가 필요한 물량에 맞춰 사람을 뽑아 쓰는 식으로 이뤄진다. 반 사장은 "여권 발급 신청이 한꺼번에 몰리게 되면 발급에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수 있다"며 "유효기간이 만료된 국민은 올해 미리 만들어 두는 게 좋다"고 조언했다.
▶▶He is…
△1956년 경북 상주 출생 △1977년 행정고시 21회 △1978년 국제대
[김정환 기자 / 사진 = 한주형 기자][ⓒ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