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뢰 무너진 공공개발 (上) ◆
경기도 남양주시에 살고 있는 석양순 씨는 집과 공장의 토지를 수도권 제2순환고속도로 건설에 수용당할 처지에 놓였다. 당초 보상금을 받으면 인근에 집과 공장을 다시 마련할 생각이었지만 사업시행자가 제시한 금액을 보고 참담했다.
건평 108㎡인 집에 대한 보상액은 1억1700만원에 불과해 주변의 작은 아파트 구입도 힘든 수준이다. 가구 공장은 환경규제 때문에 인근에 새롭게 인허가를 받는 것도 불가능하다. 폐업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시행자 측은 4개월 치 영업이익만 보상하겠다고 알려왔다. 석씨는 "공장을 닫으면 가족 생계가 사라지고, 직원 8명은 일터를 잃는다"며 "보상액이 적어 대체 공장은커녕 비슷한 크기의 땅도 못 사고 있다"고 울먹였다. 한국토지주택공사(LH) 직원들의 광명시흥 신도시 토지 투기 의혹으로 촉발된 논란이 일파만파 커지면서 공공 개발사업의 신뢰성이 바닥부터 흔들리고 있다.
그동안 LH 직원과 공무원, 시의원 등이 정보력을 동원해 '전문 투기꾼' 행태로 부를 축적해온 사실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이런 투기꾼은 못 막으면서 정작 충분한 보상을 받아야 할 원주민들은 헐값에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기회에 LH에 대한 개혁은 물론 택지 후보지 선택부터 비리 차단, 감정평가, 보상 등 공공 개발제도를 재검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18일 중앙토지수용위원회에 따르면 최근 3년간(2017~2019년) 정부가 공공개발 중인 토지의 원소유주가 보상액에 합의하지 않아 재결 처리한 건수는 총 1만9294건에 달한다. 중앙정부가 아닌 지방자치단체 산하 지방토지수용위원회 심의 건까지 포함하면 약 3만건으로 매년 1만건이 넘을 것으로 관련 업계는 추정하고 있다.
김현성 법무법인 도시와사람 변호사는 "토지 수용을 둘러싸고 매년 LH 등 정부기관과 원소유주 간 수용을 둘러싼 분쟁이 끊이지 않는 만큼 이번 기회에 확실한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최희석 기자 / 차창희 기자 / 김형주 기자]
투기꾼만 배불린 토지보상
개발정보 빼낸 전문 투기꾼은
1~2년 단기투자로 치고 빠져
수용 안되는 인접땅서 큰수익
장기거주·공장운영 주민들은
시가 80%인 공시가로 보상금
양도세까지 물어 갈곳 없어져
최근 경기 하남시 풍산동의 한국토지주택공사(LH) 하남사업본부 앞.
인천과 부천, 하남, 과천, 남양주 등 수도권 3기 신도시 추진지역 주민들이 몰려 "실제 보상액은 시세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며 "3기 신도시 졸속정책 중지하라"며 집회를 열었다.
임채관 공공주택지구 전국연대 대책협의회 의장은 "주민들은 평생 피땀 흘려 일군 집과 농토를 강제로 빼앗기게 될 처지에 놓였다"며 "이제라도 사유재산권 침해와 불이익을 당한 100만 피수용인들의 불만을 해소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LH 직원과 일부 공무원들의 신도시 투기와 달리 10년, 20년 그 지역에서 오랫동안 터전을 닦아온 원주민들의 불만이 폭발 직전이다. 왕버들나무를 심어 보상금을 높이는 등 경찰 수사로 전문투기꾼들의 행태가 속속 드러나고 있지만, 수용당하는 터에 원래부터 자리를 잡고 살던 원주민들은 보상금으로 새 터전을 마련하기도 힘들기 때문이다.
남양주시 화도읍 3393㎡ 규모 토지에서 공장을 운영하던 황 모씨도 공장 전체와 땅이 수용될 처지에 놓였다. 사업시행자는 땅에 대한 보상가로 3.3㎡당 67만원 남짓을 제시했다고 한다. 하지만 인근 땅값은 이미 3.3㎡당 최소 80만원을 넘고, 90만~100만원까지 높아진 곳이 대부분이다. 보상금을 받아서 인근에 공장 용지를 마련할 방법이 없다는 이야기다. 황씨는 "수용절차가 진행되면 공장 직원들과 가족들은 생업을 잃게 된다"며 "턱없이 적은 보상금으로는 인근에 똑같은 규모로 공장 운영도 힘들다"고 울분을 터뜨렸다.
10여 년 전부터 화도읍에서 의자 공장을 운영해온 석양순 씨도 사정은 비슷하다. 석씨의 경우 토지에 대해서 받은 수용보상금은 3.3㎡당 209만원이다. 그러나 인근에서 같은 지목의 토지를 구매하려고 하면 400만원은 줘야 하는 상황이다.
또 석씨가 받은 총수용보상금 18억1000만원 중 양도소득세 등 세금 약 5억원을 떼고 나면 토지뿐 아니라 지장물에 대한 보상금을 모두 합해도 같은 지목의 땅을 1000㎡ 정도밖에 못 사는 상황이다. 이처럼 토지 수용에 대한 땅 주인의 반발이 많은 것은 그만큼 강제 수용되는 토지가 많고, 투기꾼이 아닌 원주민들이 제대로 생활여건을 복원할 수 있는 만큼의 보상이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최근 LH 사태로 문제가 된 '투기꾼'들에게 이들 공공개발 지역은 주요 먹잇감이다. 수용 시 토지 보상금액이 크지 않다는 건 투기꾼들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이 때문에 가격이 오르기 전 토지를 매입해 1~2년 이자를 내며 버틴 뒤 보상금을 받고 팔고 나온다. 두 배 이상 수익이 날 수도 있지만 대개 수십 %대 정도의 수익률이면 성공한 투기다. 이들이 가격이 싼 맹지를 사거나 묘목을 심는 건 그 와중에도 최대한 수익률을 높이기 위해서다.
심교언 건국대 부동산학과 교수는 "전문투기꾼들의 목적은 개발 예정지 인근 땅을 사들여 수용당하지 않으면서 신도시 입주 후의 이점을 누리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심 교수는 또 "개발 예정지의 정확한 개발도면까지 알 수 있다면 몇 배의 수익을 올리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덧붙였다.
이에 반해 수용 토지에서 오래 살아온 원주민들이 받는 수용보상금은 시장가치보다 낮은 공시지가를 기준으로 평가하기 때문에 늘 갈등의 원인이 되고 있다. 이승태 법무법인 도시와 사람 대표변호사는 "현실에서 수용보상금액은 보통 시가의 80% 선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3기 신도시 개발에 따른 수용보상금과 관련해 토지 소유주들이 가장 반발하는 문제점 중 하나는 양도세다.
피수용자들은 수용보상금을 받아 기존에 살던 집과 토지와 비슷한 가치의 부동산을 매입하게 된다. 하지만 보상금에 양도세가 부과돼 실제 사용할 수 있는 자금은 더 부족할 수밖에 없다. 보상금에 대한 양도세는 총보상금에서 취득세와 특별공제 등을 뺀 과세표준에서 최대 42%의 세율을 계산해 산출된다.
토지 보상 전문가인 이장원 세무사는 "대다수 소유주들이 보상금에 대해 시세 반영이 되지 않는 데다 양도세까지 부과돼 불만이 많은 편"이라고 말했다. 이 때문에
석종현 한국토지공법학회 회장(단국대 명예교수)은 "지금이라도 투기꾼과 원주민에 대한 정책을 구분해 원주민에게는 합당한 보상금을 주는 것이 분쟁을 줄이는 해결책"이라고 말했다.
[최희석 기자 / 차창희 기자][ⓒ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