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산운용사들은 "비밀 유지가 돼야 할 고객 자금의 운용 내역을 제출하라는 건 전례를 찾기 힘든 일"이라며 당혹감을 표출하고 있다.
18일 복수의 금융투자업계 관계자에 따르면 최근 금감원은 연기금 자금을 받아 국내 주식에 투자하는 주요 자산운용사들에 '지난해 11월부터 최근까지 연기금의 순매수·순매도액 자료를 제출하라'고 요청했다.
자산운용업계의 한 관계자는 "최근 금감원으로부터 국민연금, 공무원연금, 우체국보험, 사학연금 등 4대 연기금 자금의 국내 주식 순매수·순매도액 현황 자료를 요청받아 할 수 없이 제출했다"며 "감독당국이 연기금 일임계좌의 순매수·순매도액 자료를 달라고 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라고 말했다.
업계의 다른 관계자도 금감원의 자료 요청 사실을 확인하며 "일임 계좌의 경우 돈을 맡긴 연기금 동의를 받아야 자료를 제공할 수 있다"며 "일부 연기금은 자료 제공에 동의하지 않아 제출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금감원 고위 관계자는 매일경제와 통화하면서 "시장 동향 모니터링과 감독 목적으로 자료를 요청했다"며 연기금 매도에 불만을 가진 '동학개미'의 눈치를 봐서 요청한 건 아니라고 해명했다. 이 관계자는 "금융당국은 연기금에 주식을 사라 팔아라 할 권한도 없고 그런 생각을 해본 적도 없다"며 "국민연금의 경우 자금 운용은 기금운용위에서 결정할 사안"이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자료 요청을 받은 자산운용사들은 이례적인 일이라며 황당하다는 반응까지 보였다. 특히 운용사 고객인 연기금들 사이에서도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나온 것으로 전해졌다. 자료 제공에 동의하지 않은 곳도 있어 금감원에서 받아본 숫자가 대표성을 가지는지 의문을 제기하는 운용사도 있다.
국민연금의 경우 지난해 11월 기준으로 국내주식 투자 규모는 144조원이고 47%인 67조원은 외부 운용사를 선정해 위탁 운용 중이다. 금감원이 이례적으로 연기금 매매동향 파악에 나선 것은 한 달 이상 계속되고 있는 연기금의 국내 주식 매도 때문으로 보인다. 연기금별·운용사별로 구체적인 숫자 파악이 필요했을 것이라는 해석이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연기금은 지난해 12월 24일부터 2월 18일까지 36거래일 동안 유가증권시장에서 순매도를 이어가고 있다. 이 기간 중 순매도액은 12조원이 넘는다.
연기금의 매도에 대해 '동학개미'로 불리는 개인투자자들은 불만이 많다. 하지만 자본시장 전문가들은 '비중 조절'로 이상할 게 없다는 반응이다. 개인과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적잖은 인식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특히 개인투자자들은 운용 규모가 가장 큰 국민연금이 국민이 낸 돈으로 국내 주식을 계속 팔고 있다며 아쉽다는 반응을 보인다. 국민연금의 올해 말 국내 주식 투자 비중 목표는 16.8%지만 주가 상승으로 지난해 11월 이 비율은 19.6%까지 치솟았다.
연기금 매도에 대한 사회적 논쟁과 별개로 자료 요청을 받은 운용사들은 난감했다고 한다. 금감원이 세부적인 매매내역을 달라고 한 게 아니고 순매수·순매도액을 주단위로 정리한 숫자를 요청했지만 연기금 동의가 없으면 요구에 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업계 일각에선 "운용사의 큰 고객인 연기금의 매매 동향을 요구하는 것이 위법 소지가 있는 게 아니냐"는 의견도 나온다. 이에 대해 금감원 측은 "자료의 일괄 제출을 요구한 건 아니다"면서 "운용사가 연기금의 사전 동의를 받은 경우에만 자료를 내도록 한
금감원 고위 관계자는 "시장 동향에 특이사항(연기금의 지속적인 순매도)이 있으면 어떻게 매매가 이뤄지고 있는지 분석을 해야 하지 않겠냐"며 "감독당국에서 (연기금에 주식을 사라, 팔아라) 할 수 없고, 그런 일에 관심도 없다"고 말했다.
[문지웅 기자 / 문가영 기자][ⓒ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