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한해를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마음이 풍성해진 일이 있었습니다. 최고의 통찰력을 가진 구루로 꼽히는 토머스 프리드먼 뉴욕타임스(NYT) 칼럼리스트를 인터뷰할 기회를 얻었기 때문이죠. 여러 이슈들을 놓고 대화하다가 귀에 쏙 들어오는 말이 들렸죠.
"팬데믹이라는 터널에 들어섰을 때 25세 였는데, 1년 뒤에 터널을 나와보니 세상은 5년 뒤인 30세에 기대했던 세상으로 변해 있을 수 있다. 5년이 걸릴만한 디지털화가 1년 안에 일어날 수 있다."
정말 그렇습니다.
3월 팬데믹이 시작되기 전 상상할 수 없는 변화가 거침없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특히 디지털화 속도는 미래를 추월할 초음속 비행기에 올라탄 듯한 느낌입니다.
↑ 중고차 판매 문화를 바꾸겠다고 나선 카바나는 미국 곳곳에 사진과 같은 자동판매기 빌딩을 만들고 있습니다. [자료=Carvana.com] |
집 외에 가장 큰 돈을 투자하는 대상이 자동차임에도 불구하고, 중고차 시장은 늘 불신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죠. 이는 중고차 시장은 여전히 강한 정보의 비대칭이 존재하는 시장이기 때문입니다.
카바나는 100% 온라인 중고차 거래 플랫폼입니다.
같은 기간 미국 최대 중고차 리테일러인 카맥스(Carmax) 주가는 어땠을까요?
연초 89.51달러였던 카맥스 주가는 22일 8.14%나 하락, 92.33달러에 거래를 마쳤습니다. 1년 내내 제자리 걸음을 한 셈이죠.
![]() |
↑ 3월 저점 대비 10배 오른 카바나 주가 [자료=구글] |
↑ 연초대비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는 카맥스 주가 [자료=구글] |
누가 앞으로 중고차 시장을 장악할 지 답은 이미 분명하게 나와있습니다.
올해 여름 뉴욕에 정착하며 가장 큰 과제 중 하나가 중고차 구입이었습니다.
이 시기에 미국에서 심각한 중고차 공급난이 초래됐기 때문이죠.
지난 21일 '질로우' 소개 때도 매물 품귀 현상을 설명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중고차 시장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접촉 자체가 두려움의 대상이 되며 중고차 거래는 얼어붙었습니다. 중고차 인스펙션 기관들도 장기간 멈춰섰고, 시장에 중고차가 공급이 안되는 일이 벌어졌죠.
하지만 반대로 수요는 폭증했습니다.
대중교통 포비아(공포증)가 생기며, 사람들이 중고차를 사들이기 시작했죠. 공급이 부족한데 수요는 늘어나는 기형적인 시장이 됐고, 중고차 가격은 치솟기 시작했습니다.
↑ 카바나의 주요 품질 보증 프로그램 [자료=Carvana.com] |
이 시기에 사람들이 '카바나' 에서 매물을 골라보라고 추천하더군요.
두 가지 이유였습니다.
품질을 믿을 수 있다. 배송이 빠르다.
중고차 시장의 가장 큰 두 장애물을 해소한 회사라면?
코로나는 카바나에 날개를 달아줬죠. 2015년~2019년까지 매년 평균 101%(매출 기준), 89%(차 판매 대수 기준) 성장하던 회사. 여기 다시 감당못할 수요가 붙기 시작했습니다. 2020년 1~3분기 판매대수는 17만 1939대를 기록, 이미 2019년 연간 실적(17만 7549대)에 육박했습니다.
↑ 급속하게 늘어나는 카바나 분기별 차량 판매 대수 [자료=Carvana.com] |
저는 처음에 이 숫자를 보고 조금 놀랬습니다. '중고차 거래 아마존' 이라는 별명 답게 시장 점유율이 매우 높을 줄 알았기 때문이죠.
주가가 이 정도로 올랐는데, 연간 판매 대수가 이제 겨우 20만대 수준?
미국의 연간 중고차 시장 규모는 약 4000만대로, 신차 시장보다 2배 이상 큽니다. 이를 고려하면 카바나의 미국 중고차 시장 점유율은 1%도 안된다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이는 역으로 카바나 성장 잠재력이 매우 크다고 해석할 대목입니다.
↑ 중고차 시장에 파괴적 혁신이 무르익었다고 분석한 카바나 IR자료 [자료=Carvana.com] |
전미자동차딜러협회(NADA)에 따르면 미국 자동차 산업은 미국 소비에서 20%를 차지합니다. 에드먼즈닷컴(Edmunds.com)에 따르면 지난해 미국 중고차 시장 규모는 8400억 달러. 이 정도로 큰 산업이지만 시장은 파편처럼 나눠져있습니다.
중고차 딜러십이 약 4만 3000개 이상 있는데, 상위 100대 중고차 판매상을 합쳐야 시장 점유율이 8.6%에 불과합니다.
2019년 갤럽조사에 따르면 중고차 딜러를 매우 신뢰할 수 있다고 응답한 비율은 9%에 불과했습니다. 카바나는 이를 근거로 "파괴적 혁신이 무르익었다"고 진단했습니다.
↑ 라스트 마일 서비스를 제공하는 카바나. 온라인 주문시 집까지 전용 차량이 배송합니다. [자료=Carvana.com] |
그런데 무엇이 카나바를 차별화하는 요소일까요?
고객 입장에서 몇 가지를 직접 시도해봤습니다.
실시간으로 재고 현황이 나옵니다. 미국 동부시간 오후 2시에 접속하니 2만 9050대를 갖고 있다는 숫자가 뜹니다.
일단 위치 정보를 극대화한 AI(인공지능) 기술이 적용된 흔적이 보입니다.
국토가 광활한 미국에선 없어서 안될 기능이죠.
관심 차종을 검색하면, 상단에 뜨는 매물일 수록 배송이 빠릅니다. 미국 동부시간 오후 5시 이전에 주문한 인근 매물은 48시간 내 배송이 가능하다고 뜹니다. 참고로 카바나는 차량을 집으로 배송해줍니다.
↑ 12월 22일 美 동부시간 오후 2시 23분에 접속해서 한 매물을 검색할 때 보인 화면입니다. 당일 오후 5시까지 주문하면, 이르면 이틀 뒤에 배송이 가능하다고 안내가 뜹니다. [자료=Carvana.com] |
호구가 될 수는 없죠.
카바나에 2017년식 BMW X5 xDrive35i, 주행거리 30,081 마일인 매물이 있어, 대표적인 미국 자동차 시세 사이트인 KBB(Kelly Blue Book)에서 견적을 받아봤습니다. 카바나는 3만 7990달러(현금 일시불 2000달러 할인, 탁송료 무료)에 이 매물을 내놓았습니다.
상급 기준, 적정 구매가(Fair Purchase Price)는 3만 5537달러로 나왔습니다. 소매 추천가(Suggested Retail Price)는 3만 6237달러. 공식 딜러가 보증하는 CPO(Certified Pre-Owned) 가격은 3만 8037달러로 나왔습니다.
카바나 가격은 중고차 매매시 가장 비싼 CPO 시세로 형성돼 있는 셈입니다.
몇 가지 다른 차종을 넣어 KBB 추정가와 비교해보니, CPO 와 비슷한 가격을 보이는 매물이 많았습니다.
CPO는 공식 딜러가 매입해, 수리·정비를 마치고 보증이 따라붙은 일종의 '안심 가격'인데요. 각 브랜드마다 독립적으로 이렇게 중고차를 관리하죠.
다시 말해 카바나는 모든 중고차의 CPO 딜러로 포지셔닝한 셈입니다.
카바나가 판매한 차량의 공통 보증 조건은 100일간 4189마일. 결코 각 브랜드의 CPO 판매 조건보다 좋다고 볼 수는 없는데요.
이는 거꾸로 말하면 카바나가 상당 수준의 마진을 붙이는데도 시장에서 먹히고 있다는 뜻입니다.
카바나 3분기 실적 발표자료에 이를 확인할 지표가 있습니다.
차량 1대당 수익지표인 GPU(Gross Profit Per Unit) 이라는 지표입니다.
리테일 부분의 GPU는 2019년 3분기에 1305달러에서 2020년 3분기에 1857달러로 29.7% 올랐습니다. 소매, 도매, 기타부문을 합칠 경우 GPU는 같은 기간 2963달러에서 4056달러로 36.9% 개선됐습니다.
이렇게 GPU가 개선된 것은 ▲3분기 중고차 공급난에 따른 중고차 시세의 전반적인 상승 ▲매입~판매까지 기간 단축 ▲금융시장 조달 코스트 감소 등이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입니다.
카바나가 얼마나 지속가능할지를 보기 위해서는 GPU 추세에 주목해야 합니다.
계속 적자를 내던 수익지표도 변화의 모멘텀을 만났죠. 지난 3분기에는 EBITDA(이자비용, 세금, 감가상각비용 등을 빼기 전 순이익) 기준 흑자로 반전했습니다.
카바나는 자동차 판매 문화를 바꾸겠다고 선언하고 나섰습니다. 2015년 테네시주 내쉬빌에 처음으로 중고차 자판기 빌딩을 만들어 주목을 받았습니다.
고루한 중고차 시장에 도전장을 낸 카바나.
카바나의 힘은 중고차 시장 내 가림막을 투명하게 걷어내는 데 있다고 봅니다. 기존 딜러십들이 마진을 유지하는 원천이었던 정보의 비대칭성을 파괴하는 플랫폼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앞으로 어떤 성장 스토리를 써 나갈지 주목됩니다.
[박용범 매일경제 뉴욕특파원][ⓒ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