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사업 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로 증권시장에서 관심을 받은 상장사가 해당 분야에 소송을 당한 사실을 소극적으로 공시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소송을 제기당한 기업들은 언론을 통해 회사의 입장을 알리는 데는 열을 올리면서도 주주·투자자에게 회사의 상황을 공식적으로 설명하는 창구인 공시제도는 뒷전으로 밀어뒀다. 공시 의무를 부여하는 관련 규정이 느슨한 탓이다.
그러나 금융감독원과 한국거래소는 기업 자율에 맡길 수밖에 없다는 입장이다.
12일 관련업계 등에 따르면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는 메디톡스와 앨러간이 대웅제약 및 이 회사의 미국 파트너사를 상대로 보툴리눔톡신(일명 보톡스) 균주와 제조 공정을 도용당했다며 낸 소송에 대해 지난 3월 조사 절차를 개시했다.
하지만 대웅제약은 지난 1분기에 대한 분기보고서나 별도의 공시를 통해 소송을 제기당한 사실을 설명하지 않았다. 지난 4월 25일 발행한 무보증사채에 대한 투자설명서에 ITC 소송과 관련된 내용을 담았을 뿐이다.
문제는 ITC가 메디톡스의 주장을 받아들이는 판결을 내리면 대웅제약의 기업가치는 큰 타격을 받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실제 ITC 소송의 경과만으로도 대웅제약의 주가는 요동쳤다. ITC가 대웅제약의 균주 등을 소송의 증거개시(Discovery) 절차에 포함한다는 결정을 내린 사실이 국내에 전해진 지난달 13일 대웅제약의 주가는 전일 대비 7.94% 급락했다. 이후에도 주가는 내리막을 타며 지난달 30일에는 14만8000원으로 마감돼 올해 들어 종가 기준으로 최저가를 기록했다.
증권사들도 대웅제약의 기업가치를 평가할 때 이 회사가 개발한 보툴리눔톡신제제 나보타에 상당한 가치를 부여한다. KB증권은 대웅제약의 적정 주가를 추정하면서 미국과 유럽에서의 나보타 파이프라인 가치를 모두 8077억원으로 분석했다. 적정 주주지분가치 2조6043억원의 31%에 달한다.
이외에도 대웅제약에 대한 증권사의 리포트에는 '향후 나보타의 행보에 기대를'(한화투자증권 5월 31일), '나보타에 이어지는 R&D 기대감'(메리츠종금증권 5월 14일), '나보타 수출 시작'(SK증권 5월 2일) 등의 제목이 붙어 있다. 나보타가 국산 보툴리눔톡신 제제 중 처음으로 세계 최대 시장인 미국에서 시판허가를 받은 데 따른 기대감이 반영된 결과다.
그러나 메디톡스 등은 ITC에 제기한 소송에서 메디톡스의 균주를 도용해 나보타가 개발됐다고 주장하며 나보타의 미국 수입을 금지해 달라고 요구했다.
이처럼 기업가치에 상당한 타격을 줄 수 있는 소송을 제기당하고도 대웅제약이 공시를 소홀히 한 배경은 한국거래소의 유가증권시장 공시규정에 있다. 한국거래소의 유가증권시장 공시규정에 따르면 사업과 관련된 소송이 제기됐을 때 청구 금액이 자기자본의 5%(대규모 법인은 2.5%) 이상이어야 공시 의무가 부여된다. 소송 규모가 수치화되지 않으면 공시 의무가 부여되지 않는다.
때문에 소송 규모가 수치화되지 않는 미래 성장 동력의 원천기술에 대해 소송이 제기돼도, 기업이 이를 숨기려 한다면 투자자를 보호하기 힘들다는 지적이 나온다.
증권업계 관계자는 "기술특례제도를 활용해 상장된 바이오기업이 원천기술과 관련된 소송을 제기당했는데도 의무화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는 이유로 공시하지 않으면 투자자 피해가 우려된다"며 "정량적 기준 외에 정성적으로 공시 의무를 부여하도록 제도가 개선돼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한국거래소는 '자율공시'라는 항목을 둬 기업이 자발적으로 위험을 투자자들에게 알릴 수 있도록 하고 있지만, 이 역시 현장에서는 뒷전으로 밀리고 있다.
SK이노베이션은 지난 4월 29일(미국 현지시간) LG화학이 자사를 상대로 ITC에 소송을 제기한 사실을 5월 8일(이하 한국시간)에야 자율공시를 통해 공시했다. 피소 사실이 알려진 직후부터 보도자료를 통해 "이슈들을 명확하게 파악해 필요한 법적인 절차들을 통해 확실하게 소명해 나갈 것"(4월 30일), "경쟁사가 비신사적이고 근거도 없이 SK이노베이션을 깎아 내리는 행위를 멈추지 않으면 법적 조치 등을 포함한 모든 수단을 강구해서 강력하고 엄중하게 대응해 나갈 것"(5월 2일)이라며 적극적으로 대응했지만, 공시는 1주일 뒤에 이뤄졌다.
유가증권시장 공시규정 제28조는 자율공시에 대해 "유가증권시장주권상장법인은 제7조에 따른 주요경영사항 외에 투자자에게 알릴 필요가 있다고 판단되는 사항으로서 세칙에서 정하는 사항의 발생 또는 결정이 있는 때에는 그 내용을 거래소에 신고할 수 있다. 이 경우 그 신고는 사유발생일 다음 날까지 하여야 한다"고 규정한다.
SK이노베이션의 자율공시에 대해 한국거래소 관계자는 "소송의 경우 증빙이 필요하다. 법원의 소장을 송달받는 등 서류가 확인돼야 공시를 한다"며 "해외의 경우 시차도 발생하고, 소장이 아니더라도 공문, 메일과 같은 최소한의 증빙을 확인하는 데 시간이 걸릴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SK이노베이션은 지난달 8일 자율공시에서 ITC 소송과 관련된 소장을 송달받기 전이라고 밝히고 있다.
금감원의 정기공시에 대한 관리도 부실한 것으로 취재 결과 드러났다. 금감원은 사업보고서나 분기보고서에 '그 밖에 투자자 보호를 위하여 필요한 사항'이라는 항목에 '중요한 소송'에 대해 설명하도록 하고 있다. 대웅제약은 지난 1분기에 대한 분기보고서에 ITC에서 소송을 제기당한 사실을 밝히지 않고 있다. 이에 대해 금감원 관계자는 해당 소송이 중요한지 여부는 회사가 자율적으로 판단한다고 설명했다.
대웅제약과 달리 미국에서 나보타를 판매할 대웅제약의 파트너사인 에볼루스는 메디톡스가 ITC에 제기한 소송에 대해 상대적으로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나스닥 상장사인 에볼루스는 지난 3월 20일 내놓은 연간보고서(한국의 사업보고서 격)를 통해 ▲메디톡스와 앨러간(보툴리눔톡신 제제의 오리지널사이자 메디톡스의 파트너사)이 ITC에서 자사 등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사실 ▲소송 결과가 회사에 우호적이지 않을 수 있다는 가능성 ▲우호적이지 않은 소송 결과가 나왔을 때 회사가 할 수 있는 대응 방안 등에 대해 밝혔다.
기업이 자율적으로 작성한 정기공시를 관리하는 부서가 금감원에 있기는 하다. 그러나 해당 부서에서 대웅제약의 정기공시를 관리하는 담당자는 전날 매경닷컴과 통화할 때까지 대웅제약이 ITC에서 소송을 제기당한 사실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때문에
이 담당자는 자신이 제약·바이오업종에 더해 다른 업종의 기업들까지 관리하고 있다며 모든 개별 기업의 영업에 관핸 내용을 인지하고 정기공시에 반영됐는지 판단하는 건 쉽지 않다고 토로했다.
[디지털뉴스국 한경우 기자]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