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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동걸 KDB산업은행 회장이 지난 10일 서울 이화여자대학교 포스코관에서 열린 `CEO 특강`에서 강연하고 있다. [이충우 기자] |
국내 금융·산업계에서 그만큼 벼랑 끝 결단을 내려야 하는 이도 드물 것이다. 자동차·조선·해운 등 대한민국 주력산업 구조조정과 산업 재편의 최일선에 선 이동걸 KDB산업은행 회장이다.
이 회장은 지난 10일 이화여대 포스코관에서 열린 'CEO 특강'에 연사로 나서 청년들을 향해 이같이 강조하며 한국 경제가 변곡점에 섰음을 설파했다.
2017년 9월 취임한 이 회장은 지난 3월로 3년 임기의 반환점을 돌았다. 그는 기존 산업 재편과 산은의 역할 변화를 위해 뛰고 있다.
이날 이화여대 학부생 220명으로 가득 찬 강의실에서 그는 과거 세대와 미래 세대가 처한 경제 상황, 새로운 기술 혁신과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 확대 등 다양한 주제로 얘기했지만 그 핵심을 가르는 키워드는 예외 없이 '변화'였다.
이 회장이 특히 강조하는 한국 경제의 거대한 변화 흐름은 바로 '기업의 세대교체'와 미래 먹거리 산업을 둘러싼 불확실성이었다. 기존 주력 산업의 산업 재편과 향후 10년을 내다본 '씨앗 뿌리기'에 대해 정부가 소홀했다는 문제의식에서다.
이 회장은 "기술 변화가 급격하게 이뤄지면서 어떤 기업도 10년 후 생존을 보장받을 수 없는 상황"이라며 "한국 기업도 성장동력이 고갈되고 기술적으로도 한계에 다다르고 있는데 정부가 그동안 준비를 잘 못했다"고 일침을 가했다.
미국과 중국에서는 아마존, 알리바바 등 신생 서비스업 부문에서 기업이 생겨나 성장 과정에서 일자리를 창출하고 제조업의 서비스업화가 일어나고 있다. 하지만 한국은 이 같은 '서비스업의 고부가가치화'가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네이버, 다음카카오 등 1차 벤처붐 기업에 이어 쿠팡, 마켓컬리, 배달의민족 등이 2차 벤처붐 기업으로 꼽힌다. 그렇지만 한국의 주력 기업은 삼성, LG, 현대, SK 등 기존 대기업에만 머물러 있는 상황이다. 반면 인구 감소와 고령화가 급속도로 진행되면서 정부·사회의 부담도 급격히 늘어날 것으로 예측된다.
기존 제조업 기업의 구조조정도 지지부진했다. 5년 이상 한계기업으로 분류된 장기존속 한계기업 비중은 2017년 30%를 넘어섰지만 뚜렷한 대책이 없는 상황이다. 한계기업은 영업이익으로 이자비용도 내지 못하는, 즉 영업이익을 이자비용으로 나눈 이자보상배율이 3년 연속 1 미만인 기업을 말한다. 대우조선해양은 이자보상배율이 2015년 -53.8, 2016년 -20.4, 2017년 -21.7을 기록했다. 글로벌 공급과잉 이슈에 대한 선제적 대응으로 인수·합병(M&A) 등이 진작 이뤄졌어야 한다는 지적이 지난 정부에서도 여러 번 있었다. 하지만 올해 초 현대중공업과 대우조선해양 간 '빅딜'이 이뤄지기 전까지 민간기업은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마침 이날 강의는 아시아나항공이 '추가 담보 제공을 조건으로 5000억원 금융 지원'을 요청했다는 사실이 공표된 날 이뤄졌다. 이 회장은 바로 다음날일 11일 아시아나항공 자구안을 보고받은 뒤 "대주주와 아시아나항공의 인식이 너무 안일하다"고 비판한 것으로 알려졌다. 아시아나항공이 5000억원 금융 지원과 함께 요구한 '항공업 3년' 기간은 일반 기업의 30년에 해당되는 기간이어서다. 대우조선해양에 이어 아시아나항공에 대해서도 이 회장이 '무결정·무행동'보다는 강한 변화를 요구할 것이라는 것이 업계 관측이다.
이 회장은 "망할 때까지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 최악의 결정"이라며 "무엇인가 움직이고 해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기업 구조조정이나 산업 재편 이슈에서는 소수의 이익이 다수의 이익보다 우선시되는 왜곡이 발생하기도 한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서는 변화와 혁신이 구조적으로 어려운 이유를 "구질서로부터 이익을 누리던 모든 사람들이 개혁자에게 적대적이 되는 반면, 새로운 질서로부터 이익을 누리게 될 사람들은 기껏해야 미온적인 지지자로 남아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 회장은 "변화와 혁신은 말로만 할 것이 아닌 정말 절박한 과제"라며 "뭔가 변화를 일으키려고 할 때 발목만 잡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강조했다.
이 회장은 이날 '거제도에서 자랐다'며 자신을 소개한 학생이 대우조선해양 근로자의 불안에 대한 대책과 보상책을 묻자 거듭 '인위적 구조조정은 없다'며 산은을 믿어줄 것을 당부했다. 그는 "지금이 인력 구조조정 없이 합병할 수 있는 최적기"라며 "M&A로 회생시킨다고 인력·비용을 줄이는 단계는 이미 지났다"고 답했다. 이미 대우조선해양이 피크 인력에서 30%가량 인력을 줄였고 더 이상의 인력 감축은 대우조선해양의 중장기 경쟁력을 와해시킬 수 있어서다. 이 회장은 "대우조선해양이 아직도 산은 관리하에 완전히 정상화하지 못했다고 하니 특히 연구개발(R&D) 법인에서 설계하고 디자인하는 젊은 인력들의 이직이 늘어 부족 현상이 생기기 시작했다"며 "대우조선해양 경쟁력을 위해서도 산은 아래에 두기보다 산업을 재편해 회생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그는 미래를 대비한 인재 육성 측면에서는 '한 명의 천재가 10만명을 먹여살린다'는 인식을 '천재 한 명을 키우려면 만명에게 투자해야 한다'는 인식으로 전환할 것을 제안했다. 천재가 나오기를 기다리기만 할 것이 아니라 장기적 투자가 이뤄져야 한다는 얘기다. 여성 고용의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 경력단절과 임금 격차를 해소하는 것도 한국 경제의 활력을 높이기 위한 방편으로 제시됐다.
1990년대까지 개발금융, 기업금융 공급자의 역할을 주로 해 온 산은은 2014년까지 기업 구조조정 주력자로서 역할을 맡았고, 저성장이 장기화하기 시작한 2015년부터는 스타트업 육성 등 '신(新)정책금융 공급' 역할도 요구받고 있다. 산은이 새롭게 정의한 중점 추진 과제는 △혁신성장 선도 △중소·중견기업 지원 강화 △글로벌시장을 활용한 금융산업 선진화 △한반도 신경제시대 대비 등 네 가지다. 기존 대기업 위주 금융 지원도 '중소·중견기업 지원'으로 돌려 올해 금융지원 64조5000억원 중 68.2%인 44조원을 중소·중견기업에 제공할 계획이다. 'KDB Global Challengers 200' 'KDB-CIB 융합프로그램' 등 중소·중견기업 육성을 위한 전용 프로그램을 확대 운영하는 방법을 통해서다.
혁신성장을 위해서는 벤처투자 플랫폼인 넥스트라운드(KDB Next Round)를 가동하고 성장지원펀드, 기술·지식재산권 평가 대출, 신산업심사단 등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실리콘밸리 금융 지원 모델을 본떠 최근 파일럿 테스트 중인 복합대출 상품 'Venture Debt'도 혁신성장 지원을 위해 이 회장이 새롭게 고안해낸 방법이다.
▶▶ He is…
△1953년 경북 안동 출생 △경기고 △서울대 경제학과 △미국 예일대 경제학 박사 △1994~1998년 산업연구원 연구
[이승윤 기자][ⓒ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