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혁신금융비전 / 금융 ◆
K화장품 회사를 이끌고 있는 김 대표는 최근 은행에서 20억원을 대출받아 사업 확장에 나서게 됐다. 김 대표가 제약사 연구소를 그만두고 회사를 창업한 2018년 말만 해도 생각하지 못했던 대접이었다. 당시 은행 관계자는 "공장이나 토지 등 담보로 잡을 부동산이 없는데 우리가 뭘 믿고 돈을 빌려줄 수 있겠느냐"며 대출을 거절했다. 궁지에 몰린 김 대표를 도운 건 정부가 추진한 '기업여신평가시스템 혁신'이었다.
2019년 강화된 시스템 덕분에 김 대표는 보유 중이던 특허권을 담보로 5억원을 대출받는 데 성공했다. 이듬해에는 연구개발(R&D) 역량 등 경쟁사보다 높은 기술력을 인정받아 신용등급이 높아져 추가로 5억원의 신용대출을 받을 수 있었다. 지금은 기술력뿐 아니라 다양한 거래처와 사업 성장성 등 모든 면에서 탁월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어 비슷한 규모의 경쟁사보다 대출한도는 높아지고 더 낮은 금리로 대출을 받을 수 있는 혜택까지 누리게 됐다. 김 대표는 "대출 시스템 혁신 덕분에 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지 않고 적시에 투자를 이어갈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이는 K화장품 김 대표가 2년 후 겪게 될 가상 사례다.
21일 정부가 발표한 '기업대출평가 시스템 혁신 방안'은 K화장품 회사처럼 기업들이 보유한 다양한 가치를 대출심사에 반영하도록 하는 제도다. 기업으로선 담보로 제시할 수 있는 카드가 대폭 늘어나는 만큼 예전보다 쉽게 대출을 받을 수 있다. 특히 부동산 등 전통적인 담보는 없지만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는 스타트업이나 혁신기업에 유리하다. 정부는 이번 제도 개편을 통해 올해부터 2021년까지 3년간 혁신 중소·중견기업에 100조원 규모 자금을 신규로 공급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혁신은 세 가지 단계별로 이뤄진다. 먼저 첫해인 2019년에는 '일괄담보제도'의 정착이다. 특허권과 생산설비, 재고자산, 매출채권 등 실체가 있어 값을 매기기 수월한 동산자산의 담보가치를 한꺼번에 총괄해서 평가하는 제도다. 일괄담보제의 빠른 정착을 위해 정부는 법인뿐 아니라 자영업자에게도 동산담보 활용을 허용하기로 했다.
개별자산별로만 경매가 가능한 현재의 경매체계도 일괄경매가 가능하도록 바뀐다. 금융권 공동으로 활용하는 데이터베이스(DB)를 마련해 동산·지식재산권에 대한 가치평가와 매각을 쉽게 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금융위원회는 일괄담보제 도입으로 2019~2021년 3년간 중소기업들이 약 6조원의 대출을 추가로 받을 것으로 기대한다.
2020년부터는 기술 인력 수준, R&D 역량, 유사 기업 대비 기술 우위 등을 평가해 신용등급을 높일 수 있는 '기술금융제도'가 강화된다. 구체적으로 기업 대상 기술평가와 신용평가를 하나로 합쳐 기술력을 갖추면 신용등급이 자동적으로 높아진다. 이를 위해 신용정보원은 970만개 기술·특허정보 등을 토대로 기업이 속한 산업 전망, 경쟁도, 기술 우위 등을 체계적으로 분석해주는 DB를 구축할 예정이다. 성장성과 수익성을 평가할 수 있는 지표 중 하나인 기업별 매출채권 발생과 회수 여부 등을 지수화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마지막으로 2021년에는 기업의 가치를 종합·평가하는 '성장성 기반 제도'가 도입된다. 이 제도는 자산과 기술력·영업력 등을 모두 포괄한 성장성을 평가해 대출심사 때 반영한다. 정부는 2단계인 기술금융제도 활성화는 3년간 약 90조원, 성장성 기반 제도는 3년간 약 4조원의 신규 대출을 이끌어낼 것으로 추산한다.
금융위 관계자는 "이번에 도입되는 혁신 금융제도가 제대로 작동한다면 현재 연간 200조원인 신규 중소기업 대출 규모가 15%가량 늘어난다"면서 "3년 동안 매년 30조원가량의 중소기업 대출이 새롭게 발생하는 셈"이라고 설명했다.
금융사들은 기업여신 평가 방법의 다양화에 대해선 긍정적이지만 부작용을 우려하고 있다. 새로운 여신평가제도를 너무 서둘러서 도입하면 건전성 관리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지적이다.
시중은행 여신책임자는 "예금자를 보호해야 하는 은행으로선 자산건전성 관리도 중소기업 육성 못지않게 중요하고, 금융감독기관에서도 중점 관리하는 사항"이라며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상환 능력이나 담보 물건의 환가성을 고려하면 은행 건전성에는 부담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우려했다.
현재 여신심사기술로는 기술력이나 성장성을 제대로 평가하기가 이르다는 지적도 있다. 또 다른 은행 부행장은 "취지는 좋지만 과연 기업들이 가진 기술력이나 성장성 등을 제대로 평가할 수 있는 시스템이 금세 갖춰질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 <용어 설명>
▷ 일괄
[김동은 기자 / 이새하 기자][ⓒ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