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로수길 알짜입지 건물들이지만 공실로 인해 조명이 꺼진 점포가 눈에 띈다. [용환진 기자] |
지난달 애플스토어가 가로수길 한복판에 자리 잡으면서 거리에 활력을 불어넣어 줄 것으로 큰 기대를 모았지만 오히려 상권을 해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임차인들이 가장 장사가 잘되는 1층에서 짐을 빼기 시작했고 권리금 없는 매장도 등장했다. '잘되는 상권'에서 빠지지 않는 가판대 행렬도 사라진 지 오래다.
8일 저녁 방문한 가로수길은 한마디로 썰렁했다. 과거 가로수길에서 목요일 저녁은 젊은이들로 붐비는 시간대지만 이날은 달랐다. 그리 춥지 않은 기온이었음에도 그 많던 중국인과 한국인이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오직 신사동 534-18에 위치한 애플스토어 실내만 젊은이들로 가득 찼다. 애플스토어 주변에는 1층이 비어 있는 건물이 수두룩해 대조를 보였다. 예전에 아리따움 매장이 있던 신사동 533-3을 비롯해 535-14, 535-25, 535-26 등 가로수길 한복판에 위치한 건물들이 모두 1층에서 임차인이 나간 채 방치돼 있었다.
원래 가로수길 메인도로 주변은 주로 1층만 장사가 잘된다. 그런데 가로수길 메인도로 한복판의 A급 입지 1층에서 줄줄이 공실이 발생한 것은 보통 문제가 아니라는 지적이다. 인근 부동산업계 관계자는 "최근 이 지역 공실은 5년 내 최대 수준이라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건물 전체가 텅 비어 있는 곳도 눈에 띈다. 신사동 544-17, 544-9, 546-17 등은 건물 전체가 불이 꺼진 채 임차인을 구한다는 플래카드만 바람에 나부끼고 있다. 신사동 546-3과 546-5도 수입자동차 재규어 등이 들어가 있지만 일정 기간 동안만 홍보한 뒤 철수하는 '팝업 스토어'라 제대로 된 임대차 계약으로 볼 수 없다는 게 인근 부동산중개업소 설명이다.
한때 2억원을 호가하던 상점 권리금이 대부분 사라졌다. 가로수길 건물 설계를 전문으로 하는 한 관계자는 "작년 11월부터 권리금 없는 상점이 등장하기 시작했다"며 "권리금이 없는데도 임차인을 못 구해 속앓이를 하는 건물주들이 적지 않다"고 전했다.
국내외 사모펀드가 가로수길 건물을 사들이면서 상권이 망가지기 시작했다는 분석도 있다. D공인 대표는 "여기 임대수익률이 2% 수준인데 사모펀드 요구수익률은 7%가 넘는다. 요구수익률을 맞춰주는 건 불가능하다. 기존 임차인이 일단 쫓겨나겠지만 사모펀드도 결국 많은 손실을 입은 채 철수할 것"이라고 말했다.
사모펀드 자금이 가로수길에 유입되고 애플스토어 등 유명 브랜드가 들어오면서 건물주의 눈높이가 높아진 것이 상권 몰락의 주된 원인으로 꼽힌다.
가로수길 메인도로 길가 건물 가격은 대지면적 3.3㎡당 2억원이 넘는다. 가로수길은 제2종 일반주거지역이라 허용되는 용적률이 최대 200%라는 점을 감안하면 터무니없이 높은 가격이라는 게 중개업체 설명이다.
전문가들은 가로수길이 과거 압구정 로데오길이 경험했던 젠트리피케이션 다음 단계를 겪고 있다고 진단한다. 여옥경 한양사이버대 교수는 "똘똘한 임차인을 내쫓고 나면 그다음 타격을 입는 것은 바로 건물주"라며 "과거 압구정 로데오길에서 유니클로 등 대형 프랜차이즈가 진입함에 따라 기존의 특색 있는 임차인들이 쫓겨났는데 그 후 소비자들이 발길을 끊으면서 몰락의 길로 접어들었다"고 설명했다.
가로수길 한 건물주는 "애플스토어가 들어오면 유동인구가 많아져 상권 전체가 더욱 살아날 것으로 기대했지만 막상 입주가 이뤄지고 보니 애플스토어에만 사람이 몰린다"고 푸념했다.
애플스토어 입주가 애당초 가로수길에 호재가 아니었다는 설명이다. 이미 가로수길에는 대형 의류업체 또는 화장품업체가 진입했다가 철수한 사례도 비일비재하다. 한인 의류 브랜드로 주목 받았던 포에버21이 가로수길 건물을 매입해 30억원을 들여 리모델링했지만 예상만큼 흥행에 성공하지 못하면서 결국 투자비용도 못 건지고 문을 닫았다. 아리따움, 홀리스터 등 브랜드도 가로수길에 한때 발을 들였다가 결국 빠져나갔다.
주요 관광 명소였던 가로수길
[용환진 기자][ⓒ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