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성증권發 퇴직연금 지각변동
하지만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게 수익률. 이 은행에서 지난해 IRP에 가입한 고객 수익률 예시를 보여줬는데 예·적금에 안전하게 운용된 자금은 수익률이 1.4%였다. 대충 계산해도 은행에 수수료 0.4%를 내고 나면 실제 수익률이 1%도 안 된다는 얘기다. 김씨는 일반 예·적금보다 못한 이런 상품에 투자하는 게 맞는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주저하다가 그냥 발길을 돌렸다.
IRP는 퇴직연금에 가입했던 근로자가 이직하거나 퇴직하면서 받는 퇴직금을 적립해주는 계좌에서 출발했다가 2012년부터는 재직 중인 근로자도 자유롭게 불입할 수 있는 계좌로 발전했다. IRP는 은행·증권사·보험사 등에서 한 사람당 한 계좌씩 가입할 수 있는데, 오는 26일부터는 가입할 수 있는 대상이 늘어난다. 그동안 근로자만 가입이 가능했지만 앞으로는 자영업자, 공무원, 교사 등 소득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입할 수 있다. 특히 개인연금과 합산해 연간 700만원까지 세액공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절세 효과를 노리는 가입자가 상당할 것으로 예상된다.
IRP 가입 대상자 확대를 앞두고 IRP 예비 가입자들을 노린 금융권 간 IRP 수수료 전쟁이 시작됐다. 23일 금융권에 따르면 은행권은 이미 한 달 전부터 마케팅에 돌입했다. 고객들에게 안내 이메일을 보내고 사전예약을 받는 등 영업전이 치열하다. 노후자금을 관리하는 은행이 되면 초장기 고객을 확보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이를 포기할 수 없다.
특히 은행권은 기존에 직장인들이 월급 이체 등을 통해 주거래은행으로 이용하다가 IRP에 가입하는 경우가 많아 전체 IRP 사업자 중 적립금 상위 3개사가 모두 은행권(국민·신한·우리은행)일 정도다.
삼성증권이 오는 26일부터 공격적으로 '수수료 제로'를 선언한 것도 이 때문이다. 기존 사업자들의 영업권을 뚫고 들어가기 위해서는 시장 파괴적인 무기가 필요했던 것. 사실 은행권 IRP의 가장 큰 약점은 수수료였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우리나라 개인형 IRP는 12조4046억원으로 전체 퇴직연금시장의 8%밖에 안 된다. 그중 절반에 조금 못 미치는 5조6594억원(45.6%)이 은행 예·적금에 몰려 있다. 나머지 가운데 실적배당형 집합투자증권과 보험은 각각 2조763억원(16.7%), 744억원(0.6%)에 불과하다. 보수적으로 운용하다 보니 수익률도 저조했다.
은행연합회에 고시되는 시중은행 IRP 수익률(지난 1분기 기준)은 평균 1.18% 선. 여기서 수수료 0.3~0.4%가 빠지면 사실상 남는 게 없었다.
이에 따라 삼성증권은 수수료를 없애고 고객의 실수익률을 높여줘 고객층을 확대하기로 전략을 짠 것이다. 사실 그동안 IRP 수수료는 다소 과한 면이 있었다. 가령 IRP를 통해 펀드에 가입할 경우 펀드 운용사로는 운용 수수료가 빠져나가고 IRP 계좌를 운용하는 증권사로는 운용·자산관리 수수료가 나갔던 것. 그러나 삼성증권은 앞으로 증권사 몫으로 돌아오는 수수료를 받지 않겠다고 선언한 셈이다. IRP 계좌는 장기간 운용되기 때문에 수수료가 수익률에 큰 영향을 미친다. 예를 들어 IRP 계좌에 매년 300만원씩 30년간 납입하면 수수료를 0.5%만 쳐도 약 594만원이 빠져나가는 셈이다.
반면 삼성증권은 30년간 수수료를 0원으로 책정해 그만큼 고객 수익률을 높일 수 있다는 계산이다. 은행권도 IRP 계좌 확대를 앞두고 수수료 단기 인하를 비롯한 각종 이벤트를 준비하고 있었으나
이재우 삼성증권 연금사업부 상무는 "장기 투자는 수수료도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라 과감히 수수료를 없애고 고객 수익률을 높이는 방안으로 IRP 수수료 체계를 개편하게 됐다"며 "금융 소비자 보호를 통해 업계를 선도해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한예경 기자][ⓒ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