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한기업(가칭)은 2020년까지 추진하기로 했던 조 단위 규모의 바이오 투자계획을 전면 백지화했다. ㈜대한기업의 이사회 과반수를 차지한 투기자본 '알파 펀드연합'이 긴급 임시 이사회를 소집해 투자계획을 철회시켰기 때문이다. 알파 펀드연합은 ㈜대한기업에게 대형 자산 매각과 배당 확대도 요구했다.
이는 아직은 현실화하지 않았지만 국회에 계류중인 상법개정안이 통과될 경우 앞으로 벌어질 가능성이 높은 가상의 시나리오다.
감사위원을 뽑을 때 대주주 의결권을 제한하는 '감사위원 분리 선출제'와 선임이사 숫자만큼 주주에게 의결권을 주는 '집중투표제 의무화' 제도를 알파 펀드연합이 악용할 경우 충분히 일어날 일이다. 투기자본이 대주주가 보유한 지분보다 적은 지분으로 이사회 다수를 장악해 회사 경영을 흔들수 있는 셈이다.
현재 국회 계류중인 상법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할 경우 투기자본에 대응한 경영권 방어가 어렵다는 점에서 이들 법안의 국회통과를 신중하게 접근하자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22일 국회와 재계 및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상법개정안 가운데 찬반이 극명하게 갈리는 법안은 '감사위원 분리선출제도'다. 이 개정안은 지난해 8월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채이배 국민의당 의원 등 야권 인사들이 각각 발의했다.
논쟁이 불거진 것은 사외이사를 겸하는 감사위원을 선임할 때 대주주의 의결권이 3%로 제한되기 때문이다. 소액주주가 선발하는 감사위원을 늘려 이사회 감시와 견제 기능을 강화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게 도입 취지다. 대주주의 입김이 들어가지 않는 감사위원이 선출된다면 총수 일가와 대주주의 전횡을 감시할 수 있다고 보는 견해다.
하지만 단기차익을 노리는 투기자본이 3% 이하로 지분을 쪼개는 방식으로 기업 이사회에 진출하고 집중투표제까지 도입되면 투기자본의 이사회 장악이 쉬워진다. 결국 투기자본이 이 두 제도를 악용하면 실질적인 경영권을 쥘수도 있다. 집중투표제는 1주 1의결권이 아니라 1주에 대해 선임하고자 하는 이사의 수만큼 의결권을 부여하는 제도다. 예컨대 감사위원이 되는 사외이사 3명을 선임하는 경우 1주를 가진 주주의 의결권은 3표가 되는데 주주는 이사 후보 1명에게 3표를 몰아줄 수 있다.
'감사위원 분리선출제도' 를 도입하면 단일 대주주는 3% 의결권 제한에 걸리지만 3% 미만의 지분을 쪼개서 보유하고 있는 펀드연합 방식의 투기자본은 의결권 제한 규정에서 자유롭다. 여기에다 집중투표제까지 시행되면 투기자본은 이른바 '몰아주기' 방식으로 자신의 입맛에 맞는 이사를 적어도 1인 이상 선임해 이사회에 진출할 수 있다. 감사위원은 이사이기 때문이다.
실제 기아자동차의 경우 현대자동차(33.88%)와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1.74%)이 지분 35.62%를 보유하고 있으나 이번 상법개정안의 적용을 받으면 행사할 수 있는 의결권은 4.74%에 불과하다. 삼성전자(19.58%)를 비롯한 특수관계인 지분이 20.44%인 삼성SDI의 경우도 의결권이 3.86%로 제한돼 투기자본이 이사회를 장악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주)SK도 23.40%를 보유하고 있는 최태원 회장과 최기원 이사장(7.46%), 최신원 SK네트웍스 회장(0.01%) 등 특수관계인 지분이 30.89%로, SK측이 행사할 수 있는 의결권은 6.03%에 불과하다. LG전자도 33.7%를 보유하고 있는 ㈜LG의 지분이 LG측 지분의 전부를 차지해 행사할 수 있는 대주주 의결권은 단 3%로 제한된다.
경영권 위협은 대기업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식품업계의 대표 중견기업인 농심의 경우 농심홀딩스(32.72%), 신춘호 회장(7.40%), 율촌재단(4.83%) 등이 지분 45.49%를 보유하고 있지만 의결권은 9.54%로 제한된다. 제약업계의 한미약품도 마찬가지다. 한미사이언스가 보유한 41.37%의 지분으로 행사할 수 있는 의결권은 단 3%에 불과하다.
재계에서는 특검 등으로 가뜩이나 재계 분위기가 위축된 상황에서 상법개정안까지 추진되는 것에 큰 부담을 느끼고 있다.
그러나 주요 그룹들이 특검 수사선상에 올라있는 상황이라 공개적으로 문제를 제기하지도 못하는 것이 재계 현실이다. 4대그룹의 한 고위 임원은 "미국 트럼프 행정부 출범과 날로 거세지는 중국의 한국 때리기 등 해외 변수에, 특검이라는 국내 변수만으로도 이미 기업들 분위기가 염려스러운 수준"이라고 전했다. 그는 이어 "일자리를 늘리자면서 투자 의욕을 북돋워주기는커녕 기업에 재갈을 물리는 법안들이 더해지면 어떻게 사업을 하라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덧붙였다. 가뜩이나 추락한 한국의 기업가정신이 더 크게 훼손될 것이란 걱정이다.
재계에선 최근 심화되는 '반기업 정서' 등에 편승해 충분한 논의 없이 법 개정이 이뤄질 가능성을 염려하고 있다. 배상근 한국경제연구원 부원장은 "소액주주를 보호하고자 하는 제도들이 진짜 소액주주보다 외국계 펀드의 전횡 가능성만 열어줄 수 있다"며 "다양한 방안이 가능한 만큼 좀 더 숙고할 필요가 있다"고 전했다.
우리사주조합이나 소액주주들이 추천한 각 1인을 사외이사에 선임하도록 하는 내용의 '특정 사외이사 선임 강제제도'와 자사주 관련 개정안도 찬반 세력 간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쟁점 법안이다. 특히 자사주 관련 법안이 핫이슈다. 현행법상 분할회사의 자사주는 의결권이 없다. 하지만 인적분할 후 지주회사가 되는 회사(분할회사)는 기존 자사주에 대해 자회사(분할신설회사)의 신주를 배정받아 의결권을 갖게 돼 자회사에 대한 지배력을 높이는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이를 '자사주의 마법'이라고 한다. 자사주 관련 개정안을 놓고 총수 일가의 지배력 강화를 막을 수 있다는 의견과 재산권 침해라는 주장이 대립하고 있다.
냉철한 시각으로 기업 지배구조의 문제점을 바라보고 현실을 반영한 제도 개선책을 내놓아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나아가 포이즌 필이나 차등의결권과 같이 효율적인 경영권 방어수단을 마련하자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포이즌 필(Poison pill)이란 적대적 M&A나 경영권 침해 시도가 발생하는 경우에 기존 주주들에게 시가보다 훨씬 싼 가격에 지분을 매입할 수 있도록 미리 권리를 부여하는 제도를 뜻한다. 미국 헤지펀드인 스틸파트너스가 일본 불독소스를 공격했을 당시 이 회사는 포이즌필로 경영권을 방어했다. 당시 스틸파트너스는 이에 불복해 소송을 펼쳤으나 일본 최고재판소는 불독소스의 손을 들어준 바 있다
이재혁 상장회사협의회 정책홍보팀장은 "기업은 주주, 근로자, 채권단 등 모든 이해관계자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며 "반기업정서에 이끌려 과잉규제를 하기보다는 기업이 공정한 규제 환경에서 안정적으로 경영할 수 있도록 실질적인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욱 기자 / 김대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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