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인회계사 A씨는 지난해 아파트 입주자 대표에게서 가격이 비싸다는 이유로 외부감사 일감을 빼앗겼다. 한국공인회계사회에서 내려온 감사품질 지침을 준수한 것이지만 퇴짜를 맞은 것이다. A씨는 "담합 논란으로 회계사회가 지난해 지침을 철회하자 요즘은 주민들이 원하는 대로 싼값에 대충대충 해준다"며 "시간을 들여 감사를 꼼꼼하게 하면 줄줄 새는 관리비를 막아 주민들에게 더 도움이 될 텐데 안타깝다"고 말했다.
2014년 연예인 김부선 씨가 자신이 살던 아파트의 난방비 비리를 폭로하면서 촉발된 아파트 관리비 외부감사 문제가 회계사 담합 논란을 계기로 또 다른 고비를 맞고 있다.
1일 업계에 따르면 공정거래위원회는 지난달 서울사무소 소속 조사관을 서울 충정로 공인회계사회 본회 사무실로 보내는 등 담합 혐의에 대한 조사에 본격 착수했다. 공정위는 사업자단체인 회계사회가 일방적으로 최소 시간을 100시간으로 정해서 감사비를 올린 것은 가격 담합 소지가 있고, 주민의 선택권을 제한하는 것이라는 입장이다.
공정위 관계자는 "이 같은 행태는 사업자단체 금지 행위에 속한다"며 "둘 이상 사업자가 공동으로 모인 사업자단체가 지역을 분할하거나 가격을 담합하는 행위는 현행법상 공정위의 규제 대상"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회계업계에선 국토부가 주택법을 개정해 지난해 1월부터 300가구 이상 대단지 아파트에 외부감사를 의무화한 이후 유일하게 존재했던 지침이 사라져 감사비 저가 수임, 부실 감사 등 문제가 불거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회계사회는 지난해 4월 회원들에게 아파트 감사 시 회계사 3인 이상, 최소 100시간(현장감사 60시간) 이상을 투입할 것을 권고하고 미준수 시 제재하는 내용의 지침을 내렸다.하지만 감사시간 투입이 늘어나자 단지당(710가구 기준) 평균 감사비가 기존 70만원에서 250만원 정도로 올라갔다.
회계사회 관계자는 "자산 규모 500억원 이상인 금융회사의 경우 외부감사에 140시간을 투입해야 한다는 식의 지침은 일종의 가이드라인처럼 존재한다"고 밝혔다.
최중경 회계사회 신임 회장도 "최소한의 감사품질 보장을 위해 시간을 투입하라는 게 담합이라는 것은 논리적으로 비약"이라며 "관련 이익단체들이 아파트 외부감사를 받기 싫어 반발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공정위와 협의해 저가 수임과 감사품질 저하를 막기 위한 제3의 방법을 찾겠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공정위 입장은 강경하다. 사업자단체인 회계사회가 일방적으로 최소 100시간이라는 기준을 설정하고 이를 거의 반강제적으로 권고하면서 부당하게 감사비를 끌어올렸다는 것이다. 공정위 관계자는 "회계감사를 100시간 한다고 해서 부실 감사가 안 된다는 보장이 어디 있느냐"며 "이 같은 논리라면 품질을 핑계로 다른 사업자단체도 최소 시간 등을 설정하면서 가격을 올릴 수 있다"고 밝혔다. 공정위는 공인회계사회의 '방식'도 문제로 삼고 있다. 비록 권고안이긴 하지만 거의 반강제적인 지침을 사업자단체가 '일방적'으로 설정하는 것은 소비자의 선택권을 축소시킨다는 것이다. 이 관계자는 "30시간이면 충분히 회계감사를 할 수 있는 사업자도 있을 것 아니냐"며 "비용을 지불하는 입주자의 의견도 들어가면서 사회적으로 논의를 해봐야지 일방적으로 회계사회가 기준을 정하는 것은 맞지 않는다"고 밝혔다.
회계업계는 만약 지침이 제대로 시행됐다면 관리비 절감액이 더 커지는 등 효과가 클 것으로 보고 있다. 회계사회가 지난해 감사 대상 9009개 아파트 단지 중 2000곳을 표본추출해 감사 내용을 심층 분석한 결과 구체적 금액을 산출할 수 있는 지적 사항은 392건이었고,
조사 대상 아파트가 평균 710가구로 이뤄진 점을 고려하면 가구당 평균 절감 관리비가 연간 9878원에 달하는데, 이는 가구별로 부담해야 할 감사비 3500원을 3배가량 웃돈다. 지침 이전 가구별 감사비는 평균 1000원 정도로 알려졌다.
[김태준 기자 / 나현준 기자][ⓒ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