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주들의 반대로 합병이 무산 또는 연기된 사례는 2009년 현대모비스와 현대오토넷, 호남석유화학과 KP케미칼, 2008년 LG이노텍과 LG마이크론 등 여럿이지만 삼성그룹이 계열사 간의 지분 양수도나 합병을 추진했다가 실패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삼성은 올해 삼성종합화학과 삼성석유화학, 삼성SDI와 제일모직의 굵직한 합병을 순조롭게 이뤄낸 바 있어 이번 실패는 충격이 크다.
삼성은 중공업과 엔지니어링의 합병에 대해 대형화와 시너지 효과를 통해 종합 해양플랜트 회사로 도약할 수 있는 기회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시장에서는 지난해 대규모 부실을 냈던 삼성엔지니어링과 올해 부실이 늘어난 삼성중공업의 합병이 가져다줄 성과에 대해 큰 기대를 걸지 않았다. 지난달 진행된 두 회사 주주총회에서 일부 대주주가 반대 또는 기권표를 행사하는 등 합병 효과에 의문을 제기하는 의견이 적지 않았던 게 이를 증명한다.
주주들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삼성은 ‘한 번도 실패하지 않은 전력’을 믿고 합병을 무리하게 밀어붙인 측면이 없지 않다. 합병이 성공하려면 두 회사가 부실을 완전히 털어내고 각각 조선과 플랜트 분야에서 충분한 경쟁력을 갖춘 다음에 추진했어야 하는데 비정상적으로 서둘렀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삼성전자 등 그룹 계열사들이 전반적으로 실적이 둔화되고 사업 여건이 악화되면서 사업구조 개편에 조급함을 드러낸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번 합병 무산으로 삼성그룹에서는 무리하게 합병을 서두른 경영진의 책임론이 불거질 가능성도 있다.
이번 합병을 무산시킨 결정적인 변수는 주식매수청구권이었다. 주식매수청구권은 경영진의 의사결정에 반대하는 주주들이 자신이 갖고 있는 주식을 정해진 가격에 되사줄 것을 요청할 수 있는 권리다. 삼성엔지니어링과 삼성중공업의 매수 청구 가격은 각각 6만5439원과 2만7003원이었다. 두 회사의 합병에 반대하는 주주들은 그 가격에 주식을 팔 수 있는 것이다.
삼성엔지니어링과 삼성중공업 주가는 지난 17일 각각 6만800원과 2만5750원에 머물렀다. 두 회사 주가 모두 주식매수청구권 행사 가격에 못 미쳤다. 주주들이 주식매수청구권을 행사하는 것만으로 삼성엔지니어링 주주는 주당 4639원, 삼성중공업 주주는 주당 1253원의 이득을 보게 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주식매수청구권 행사가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증권사 관계자는 “삼성은 두 회사가 합병 후에 중장기적으로 낼 수 있는 성과를 기대했겠지만 일반 주주들은 먼 미래의 불확실한 이득보다는 당장의 명백한 현금이 더 절실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삼성그룹 계열사 간 합병에 한번 제동이 걸린 만큼 앞으로 지배구조와 연관이 있는 다른 계열사들 간의 지분 거래에도 주주들이 반대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상황이 됐다. 지금까지 삼성의 결정에 대해서는 암묵적으로 지지했던 주주들이 지배구조 개편과 경영권 승계를 위해 필요한 계열사 지분구조 개편에 대해 얼마든지 반기를 들 수 있다
[이진명 기자 / 노현 기자 / 신현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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