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갑오년(甲午年) 말(午)의 해가 밝았다. 전국에 말과 관련된 지명은 과연 몇개나 있을까. 국토지리정보원(원장 임주빈)은 최근 말과 관련된 지명을 분석한 결과, 우리나라 150만 여 개 지명 중 744개가 말과 관련됐다고 밝혔다.
말과 관련된 지명 중 가장 많은 이름은 ‘마산’으로 전국에 49군데나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 [출처 국토지리정보원] |
전국적으로 말과 관련된 지명이 가장 많은 곳은 전라남도로, 전라남도 장성군 남면 녹진리의 ‘마산’ 마을 등 142개의 지명이 확인됐다.
전라남도에 특히 말 관련 지명이 많이 분포하는 것은, 예로부터 가축 관리가 편리해 말목장이 많이 설치됐던 것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글자별로 살펴보면, ‘마산’을 비롯해 ‘천마산’, ‘철마산’, ‘역말’ 등의 지명이 많이 사용되고 있었고, 마을 명칭 외에도 산과 고개에도 말과 관련된 지명이 다수 발견됐다.
말띠를 상징하는 한자는 ‘낮 오(午)’로 시간으로는 오시(午時)이며, 하루 중 태양이 중천에 솟아 대지를 밝히는 오전 11시부터 오후 1시 사이를 가리킨다.
달(月)로는 정오의 태양 높이가 가장 높아지며 뜨거운 열기를 뿜어내는 음력 5월을 의미하는데, 우리 조상들이 말을 십이지 동물 중에서도 가장 역동적인 동물로 인식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말은 힘과 역동성, 그리고 신성성을 상징하는 동물로 우리 조상들의 삶과 문화에 밀접한 관계를 맺어 왔으며, 이러한 이미지가 지명에도 다수 반영되어 있다.
말의 다양한 모습과 관련된 지명이 특히 많은데, 봉우리가 말의 귀를 닮아 이름붙여진 ‘마이산’, 고개의 모습이 말안장을 얹는 말의 등과 닮은 ‘마령재’ 등이 대표적이다.
말이 중요한 교통수단으로 이용됨에 따라 장거리 이동시 지친 말을 교환하고 쉬었던 선조들의 생활 모습도 지명으로 남아 전해지고 있다.
이러한 지명들은 경상북도 상주시 모소면 삼포리의 ‘역마루’, 충청남도 보령시 주포면 관란시의 ‘역말’ 등 ‘역(驛)’과 관련된 지명인 것이 특징이다.
뿐만 아니라 ‘천마산’, ‘용마봉’ 등의 지명에서는 말이 하늘을 나는 천상의 동물로 묘사되어, 우리 조상들이 말을 신성한 동물로 여겼음을 보여준다.
국토지리정보원 관계자는 “말의 형상이나 말과 관련된 설화는 우리 지명 속에 깊이 자리잡아 내려오고 있다”며 “우리의 문화와 역사가 녹아들어 있는 지명을 보다 체계적으로 관리·활용할 수 있도록 지명법 제정을 추진하는 등 지명 관련 제도를 정비 중”이라고 설명했다.
서울시 말죽거리
‘말죽거리’로 잘 알려진 서울 양재동 일대는 대표적인 역(驛)과 관련한 지명으로서, 여러 마리의 말을 마련해 두고 공문을 전달할 목적으로 다니는 사람에게 말을 제공해 주거나 바꿔 주던 일을 했던 곳이다. 옛 지도에는 마죽거리(馬竹巨里), 마죽거(馬竹巨)등으로 표기되어 있다.
말죽거리는 조선시대 역(驛)이 있어 여행자들이 타고 온 말에게 죽을 끓여 먹였던 데서 유래됐다고 전해진다. 조선시대 인조가 이괄의 난을 피해 남도로 가는 길에 지금의 양재역에 인근에 이르러 기갈이 심할 때 죽을 쑤어 임금에게 바치니, 임금이 말위에서 죽을 마신 데서 유래됐다는 설도 있다.
대구광역시 마비정
대구광역시 화원읍 본리리 ‘마비정’은 주인의 손에 안타깝게 목숨을 잃은 명마에 얽힌 슬픈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최근 이 마을은 유래를 활용한 ‘벽화마을’로 조성되어 전국적인 관광명소로 알려지고 있다.
옛날 어느 장군이 마을 앞산에 올라가서 건너편 산에 있는 바위를 향해 활을 쏘고 말에게 화살보다 늦게 달려가면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이에 그 말이 있는 힘을 다해 재빨리 달려갔으나 화살을 따라잡지는 못했고, 말은 결국 죽임을 당했는데 이를 본 마을 사람들이 말을 불쌍히 여겨 ‘마비정’이라는 정자를 세우고 추모했다고 전해진다.
경상북도 포항시 구룡포 일대 말목장성·말봉재
말은 군마로서 국가적인 재산으로 관리되기도 하였는데,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구룡포 일대에는 조선시대 감목관을 파견해 말을 키우던 국영 목장의 흔적과 함께 ‘말봉재’ 지명이 남아있다.
당시 말을 키우기 위해 쌓은 돌 울타리는 길이가 약 8km에 달했다고 한다. 석책은 말이 들던 돌문을 시작으로 동해면 흥환리까지 이르렀는데, 아직도 약 5km 가량의 석책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여지도, 경주도회좌통지도 등 고지도에서도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매경닷컴 이미연 기자 enero20@m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