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닷컴 MK스포츠 이승민 기자] 그 곳에 그들이 있었다.
1982년 출범 이후 34시즌. 연간 700만 관중의 한국 으뜸 프로리그로 자리 잡기까지 수많은 선수들이 KBO의 성장과 감동을 채웠다. 그들 중에는 역사와 기록은 기억하지만 많은 팬들이 깜빡 잊어버리고 만 이름들, 추억 속에 묻힌 레코드 홀더들이 있다.
야구를 기다리는 2월의 MK스포츠가 지금 그라운드의 ‘슈가맨’들을 소환해본다. (편집자 주)
↑ 문희수는 1988년 9월1일 KBO 첫 투수 DH 연속승리를 기록했다. KBO의 다섯차례 투수 DH 연속승리 중 유일하게 선발승이 끼인 기록이기도 하다. 사진=기아타이거즈 제공 |
KBO의 성장기를 맨 앞줄에서 이끌었던 첫 번째 ‘왕조’는 ‘8090’ 시절의 해태 타이거즈다.
타이거즈는 리그 출범 첫해였던 1982시즌을 승률 5할을 채우지 못한 중위권(승률 0.475/4위)에서 출발했지만, 이듬해인 1983년 첫 한국시리즈 챔프에 오른 이후 1993시즌까지 11번의 시즌 가운데 7차례나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이중 네 번의 우승은 정규시즌 1위가 아니었지만, 포스트시즌에서 최후의 승자로 남아 단기전 승부의 최강팀으로 각인된 ‘가을호랑이’의 전설을 썼다.
강력하고 압도적이었던 당시 해태의 추억 속에는 깨끗한 투구폼의 고졸 에이스 문희수(51·고창 영선고 코치)가 있다.
1983년 고교야구 3개 전국대회(봉황기/대통령배/황금사자기)에서 모두 우승하면서 최우수투수상을 독차지했던 광주일고 에이스 문희수는 1984년 타이거즈 유니폼을 입었다. 이상윤 선동열 차동철, 그리고 이강철 등으로 이어진 광주일고 출신의 전성기 타이거즈 주축투수 계보 중에서 드물게 대학을 거치지 않고 입단한 그는 1995시즌을 끝으로 해태에서 은퇴하면서 성인 야구선수로서의 커리어를 온전히 타이거즈에서만 쌓았다.
문희수는 ‘해태왕조’의 가장 깔끔했던 첫 번째 우승드라마에서 마지막을 완성했던 스타다. 해태가 전후기 1위 팀으로서 한국시리즈까지 우승했던 최초의 ‘완벽한 패권’, 1988시즌의 한국시리즈 MVP였으니까.
당시 그는 빙그레와의 한국시리즈에서 선동열을 구원해 1차전을 마무리했고 3차전에서는 리그 2호 KS 완봉승, 시리즈 스코어 3승2패로 쫓겼던 최종 잠실 6차전에서는 1실점 완투승하면서 2승1세이브를 따내고 KS MVP에 올랐다.
일찌감치 고교 시절부터 ‘우승체력’을 키웠던 문희수는 프로시절 내내 줄곧 가을에 더 강했던 ‘진짜 호랑이’였다. 4차례 플레이오프, 5차례 한국시리즈에 출전하는 동안 무패의 투수로 남았고 위력적이었던 통산 KS 성적은 9경기 4승1세이브 평균자책점 0.68이었다.
문희수가 ‘KBO 레코드북’에 남긴 진기록은 KBO 1호 더블헤더 연속승리다. 리그 출범 7년째인 1988년 9월1일 전주구장에서 만난 롯데를 상대로 기록했다.
이후 하루 2승을 쓸어 담은 DH 연속승리 투수는 2004년 6월23일 수원 현대전의 유동훈(KIA 코치)까지 모두 5명이 나왔지만, 문희수의 기록이 그중 특별한 것은 유일하게 ‘선발승’이 끼인 기록이라는 데에 있다. 문희수는 DH 1차전에서 구원승을 따낸 뒤 2차전에 선발 등판해 승리투수가 됐다. 그의 기록을 제외한 KBO의 네 차례 DH 연속승리는 모두 불펜 투수들의 연투에 의한 성과로 8번의 구원승으로 이루어졌다.
34시즌동안 다섯 차례 밖에 나오지 않았지만, 투수 DH 연속승리는 앞으로 더욱 추가가 쉽지 않은 기록으로 꼽힌다. 일단 우천취소경기를 소화하는 방법 가운데 더블헤더에 대한 리그의 선호도가 상당히 떨어져 기록의 기회 자체가 제한적인데다 투수들의 연투 피로도에 대한 고려가 ‘옛날야구’와는 크게 달라졌다. 특히 철저한 마운드 분업화가 자리 잡으면서 구원과 선발로 하루 2승을 챙긴 ‘전천후 에이스’ 문희수의 기록은 이젠 치열했던 그 시절만이 가졌던 무용담으로 읽힌다.
[chicleo@mae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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