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다시 일제에 겁박 받고 '절대 한글을 쓰면 안 된다'는 명령을 들었을 때 진 기자는 어떻게 할 것 같아요. 한글을 썼다고 내일 당장 잡혀들어가 고문에 목숨을 잃을 수도 있어요. 그런 상황에서 한글을 쓸 수 있겠어요? 나도 못 할 것 같아요. 그런데 윤동주 시인은 숨어서 썼어요. 그런 점이 나를 반성하게 했죠."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에 주목한 영화 '사도'로 관객의 마음을 동하게 한 이준익(57) 감독은 이번에도 관계에 주목했다.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으로 꼽히는 윤동주 시인의 삶과 그의 친구이자 사촌, 라이벌인 독립운동가 송몽규의 관계에 주목한 영화 '동주'(17일 개봉)다.
그간 다큐멘터리에서나 윤 시인을 만날 수 있었지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다뤄진 적이 없다. "윤 시인만으로 드라마틱한 무언가를 만들어내기 어려웠기 때문"이라는 게 이 감독의 판단이었다. 하지만 송몽규와의 관계를 통해 두 사람의 시대적 아픔을 스크린에 담아낼 수 있다고 확신했다.
시작은 일본 교토 도시샤 대학을 찾아 윤동주 시비를 봤을 때였다. "윤동주를 죽인 일본에서도 시인의 시비를 세울 정도로 그를 좋아해요. 그 기분이 묘했죠. 윤동주를 좋아하고 시를 사랑하는데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 그의 삶에 관해 관심이 없었다는 게 죄스러웠어요. 이 땅에 남게 된 그 과정을 보여주고 싶었죠. 4년 전이었는데 밀린 숙제를 끝낸 기분이네요."
그 과정에 송몽규의 관계를 넣었다. "윤동주 전기만으로 영화를 꾸렸다면 과도한 미화로 오인당할 수 있었겠죠. 어떤 한 존재는 누군가와의 관계 속에서 성숙하는 거예요. 질투와 허영심 등 인간의 심리들이 꿈틀거리죠. 모든 걸 보여줄 순 없지만 그 시가 탄생할 개연성이 있는 걸 발췌해 주옥같은 시와 짜낸다면 그것이 윤동주 시인과 송몽규 열사를 모시는 가장 예의 바른 태도일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이 감독은 "'사도' 이후 돌다리를 두드려 건넌 느낌은 있었다"고 인정했다. 하지만 영화를 향한 기대감을 낮추기 위해 저예산(5억원) 흑백 영화를 고집했다. 성역 같은 존재를 건드리는데 "영화 망했다"는 소리를 들지 않길 원했기 때문이다. "시각 정보가 많이 안 들어오면 오히려 더 인물에 초점을 맞출 수 있는 거죠. 인물 관계에 집중하기 위한 효과적인 설정이 흑백이라고 할 수 있죠. 처음에는 흑백이 주는 생경함이 불편하기도 할 텐데 인물들의 심리, 내면의 밀도가 접촉되면 흑백과 컬러라는 구분을 잊게 할 거라고 믿어요."
'사도'와 '동주'는 역사다. 특히 '동주'는 근역사다. 과거를 열심히 찾아본다고 해도 편하게 화면에 구현하는 건 쉽지 않았을 테다. 이 감독은 "역사를 담는다는 게 처음에는 부담감이었는데 목표를 정함으로써 부담감을 이겨낼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우리는 지난 70년 동안 일제 강점기에 대해 피해자의 억울함만 이야기했잖아요. 가해자에 대해 정확히 분석해서 그 모순과 부도덕성을 지적하고 치밀하게 추궁하지 않았죠. 그래서 일본 고등형사에게 굴하지 않았던 몽규와 동주를 그대로 옮겨왔어요. 일본 군국주의의 모순과 부도덕성을 동주와 몽규의 입으로 그려내고 싶었어요. 이들을 보면서 우리가 소홀했던 것에 반성하는 마음을 가졌으면 해요. 부끄러움이 크거든요. 박정민이 언론시사회 때 눈물을 흘린 것도 그 미안함 때문에 그런 거예요."
이 감독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박정민을 캐스팅한 이유에 대해 "유명인이 나오면 그 이미지에 송몽규가 덧씌워지니까 안 된다고 생각했다"며 "하지만 정민이는 신념 있는, 연기 잘하는 멋진 배우"라고 했다. 그러면서 "내면에 가진 연기적인 걸 발현하는 데 방해가 되면 안 된다는 게 내 연출법이다. 혼자서 몽규 역할을 잘 소화했다"고 추어올렸다.
'열등감'은 영화 '동주'를 설명하는 주요한 단어 중 하나이기도 하다. 천만 관객을 동원한 '왕의 남자'로 사극 명장이라는 별명을 들은 그도 열등감을 느낄까. 그는 "난 학교 다닐 때 공부도 못 했고, 빈자의 자식이었다. 학연이나 지연, 혈연으로
jeigun@mk.co.kr/사진 영화사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