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장사 주총시즌 돌입 ◆
↑ 9일 영진약품이 주주총회를 열고 감사위원 선임 안건을 올렸지만 필요한 의결권 수를 채우지 못해 부결됐다. 섀도보팅 폐지에 따른 부작용이 현실화한 첫 사례다. 이날 오전 서울 송파구 영진약품 본사에서 열린 주총에서 한 주주가 박수준 전 대표에게 질문을 하고 있다. |
9일 박수준 전 영진약품 대표의 발언에 주주총회장은 크게 술렁였다. 우려가 현실이 됐기 때문이다. 작년 말 섀도보팅(의결권 대리행사) 폐지로 인해 주요 상장사 주총의 첫 파행 사례가 나온 것이다.
이날 서울 송파구에 위치한 국민연금공단 송파지사 건물에서 진행된 주총에서 영진약품은 필요한 의결 정족수를 채우지 못해 감사위원회 위원 선임에 실패했다. 영진약품은 소액주주의 의결권 확보를 위해 영업사원을 동원하며 주주 설득에 나섰으나 결국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다고 토로했다. 주총은 시작부터 삐꺽거렸다. 한 주주는 주총이 시작되기 전 "왜 집까지 찾아와 주총을 오라고 하느냐"며 고함을 쳤다. 현장에 있던 다른 주주는 "경영 성과를 들으러 온 자리가 너무 소란스럽다"며 불만을 내비쳤다.
박 전 대표가 감사위원 선임 부결을 발표하자 한 주주는 "감사위원 부결을 미리 준비했어야 하지 않느냐"며 "부결로 인해 생길 수 있는 부작용과 대책을 알려달라"고 질타하기도 했다. 이번 주총을 통해 영진약품이 감사위원 선임에 실패한 이유는 작년 말 섀도보팅이 수명을 다하고 일몰(폐지)됐기 때문이다.
이날 한국상장사협의회에 따르면 대주주 지분율과 5% 이상 보유 주주 현황, 소액주주 의결권 행사율 등을 감안해 섀도보팅 폐지로 올해부터 향후 3년간 516개사가 감사 선임에 난항을 겪을 것으로 분석된다.
업계 관계자는 "기업 경영과 주총의 특성을 전혀 이해하려 하지 않고 일단 제도만 폐지하다 보니 상장사들 부담이 가중됐다"며 "이 같은 사실을 알리려고 해도 정부는 전혀 귀 기울이려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영진약품 대주주는 KT&G로 전체 지분 중 52.45%를 갖고 있다. 그러나 감사위원 선임 시 대주주가 주총에서 행사할 수 있는 의결권은 3%로 제한된다.
감사 선임을 위한 최소 요건은 의결권 지분 25%이므로 나머지 47.55%의 기타 주주 지분과 대주주의 3% 지분을 합친 50.3% 가운데 25%를 확보해야 했지만 이를 달성하지 못한 것이다. 감사위원을 선임하지 못해 법인의 감사위원회가 법적 요건을 갖추지 못하면 해당 법인은 과태료 5000만원을 물어야 한다.
업계 관계자는 "관리종목 지정이나 상장폐지 등의 불이익은 사라졌지만 상장사 부담은 여전하다"고 입을 모았다.
영진약품 측은 최선을 다했다고 항변하고 있다. 회사 측은 주주가 인터넷을 통해 간편하게 의결권을 행사하도록 전자투표를 독려해왔지만 지분 1.8%가 모자라 주총을 다시 열어야 할 판이다.
이처럼 주총 혼란은 대형사보다는 중소형 상장사에 집중될 것으로 예상된다.
대기업은 주요 기관투자가의 지분이 골고루 분포돼 있어 상대적으로 주총 안건이 통과되기 쉽다. 실제 이날 주총을 연 현대모비스는 정관 일부 변경, 사내·사외이사 3명 선임, 감사 선임 등 주요 안건을 25분 만에 속전속결로 처리했다. 기아차도 이날 주총에 의결권을 위임받은 기관투자가 중심으로 972명의 주요 주주가 참석해 잡음 없이 끝났다. 그러나 소액 주주들로 주식이 분산된 중소형 상장사들은 주총을 열기도 전에 또 다른 주총 계획을 짜야 하는 상황이다. 이달 주총을 앞둔 A 바이오 상장사 관계자는 "주주 명부를 통해 집 주소만 보고 일반 주주를 모으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며 "일반 주주들은 사실상 포기하고 기관투자가 위주로 의결권 확보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말했다.
섀도보팅 폐지의 대안으로 제시된 전자투표도 큰 호응을 얻지 못하고 있다. 유가증권시장 상장사의 전자투표 도입률은 45%로 과거보다 높아졌지만 실제 주주들의 참여율은 1%를 넘기 어렵다는 게 주요 상장사들의 설명이다.
장기 투자가 자리 잡지 못한 국내 자본시장 속성상 개인들의 주총 참여가 부진해 상장사들의 주총 파행이 속출할 수 있다는 의견이다. 상장사협의회에 따르면 최근 코스닥 시장에서 소액주주들의 평균 주식보유 기간은 3.1개월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상장사들은 의결 정족수 요건을 완화해달라고 지속적으로 요청 중이다. 25%라는 의결 정족수 요건은 이례적 규제라는 것이다. 영국, 독일, 프랑스, 캐나다, 호주, 일본, 중국은 의결 정족수 규제 자체가 없으며 미국은 주총 출석 주주 3분의 2만 찬성하면 주요 안건이 통과된다.
■ <용어설명>
▶ 섀도보팅 : 정족수 미달로 주주
[문일호 기자 / 고민서 기자 / 정희영 기자][ⓒ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