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마항쟁 기념식서 추미애 "철저한 조사 해야"…부마항쟁은 무엇?
박정희 정권의 유신독재 체제에 맞서 부산과 마산에서 일어난 민주화 운동인 부마민주항쟁 38주년 기념식이 16일 오전 부산 민주공원에서 열렸습니다.
이번 기념식은 부마항쟁 관련 단체가 지금까지 부산과 마산에서 각각 치러오던 행사를 처음 합동으로 준비한 것입니다.
기념식은 박종철 합창단 공연, 국민의례, 경과보고, 기념사, 제26회 민주시민상 시상, 유치준 씨 유족 발언, 축사, 특별공연 순으로 진행됐습니다.
부마민주항쟁 관련 단체들은 박근혜 정부 시절 발족해 지난 3년간 제대로 된 조사를 하지 못한 부마항쟁 진상규명위원회의 활동 기한을 연장해 항쟁 진상규명과 재조사가 이뤄져야 한다고 촉구했습니다.
허진수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 회장은 "부마항쟁은 박정희 유신독재를 전면 부정한 사건인데 부마항쟁을 부정하는 인물들이 항쟁 진상을 조사한 것 자체가 모순이었다"고 말했습니다.
부마민주항쟁 첫 희생자로 확인된 유치준 씨의 아들인 유성국(56) 씨는 "아버지는 38년이 지나도록 부마항쟁 희생자가 아닌 신원미상 사망자로 남아있다"며 "형식적인 조사로 3년을 보낸 진상규명위원회를 새로 구성해 철저한 조사를 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축사에 나선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기념식 참석 전 문재인 대통령이 개헌 시 헌법 전문에 5·18 광주민주항쟁과 함께 부마민주항쟁 정신을 명기하겠다고 하셨다"고 말했습니다.
추 대표는 "부마항쟁의 저항정신이 없었다면 유신독재가 무너지지 않았고 광주민주항쟁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며 "부마항쟁이 오늘 한 번의 기념식으로 끝나지 않도록 적폐의 잔재를 걷어내고 촛불의 정신을 실천할 때까지 힘을 합쳐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1979년 부마항쟁은 이런 박정희 정권의 유신체제를 통한 독재, 오일 쇼크로 인한 경제적 모순이 모여 일어난 학생·시민들의 반정부 민중항쟁이었습니다.
1979년 10월 16일 아침 10시경, 부산대학교 구내 도서관 앞에서 약 500명의 학생들이 모여 반정부 시위를 벌이는 것으로부터 시작됐습니다.
이날 학생 수백 명이 연행되고 경찰관과 학생 100여 명이 다쳤고, 이튿날 학생들의 시위가 더욱 격화됐습니다.
민주화운동은 18일에 마산으로 확산돼 해질 무렵 1,000여 명의 경남대학 학생들이 마산시내 번화가에 산발적으로 집결, 시민들이 가담한 가운데 격렬한 시위를 벌였습니다.
박정희 정부는 18일 새벽 0시를 기해 부산 일원에 비상계엄을 선포했고, 10월 24일 132명을 검거, 23명을 구속처리했습니다.
부산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한 지 2일 뒤인 10월 20일 정오를 기해 정부는 경상남도 마산 및 창원 일원에 위수령을 발동했습니다.
이와 함께 마산 지역 작전사령부는 마산일원에 군을 진주시켜 시청 등 정부기관과 언론기관 등 공공건물에 대한 경계에
통행금지가 2시간 연장됐고, 경남대학과 경남산업전문대학은 무기한 휴교조처가 취해졌습니다.
계엄령이 선포된 부산 지역에는 공수부대가 동원되어 시위하는 시민과 학생에 대해 강도 높은 진압이 이뤄졌습니다.
부마항쟁은 유신체제를 아래로부터 붕괴시킨 결정적인 사건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MBN 뉴스센터 / mbnreporter01@mb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