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말 서울 관악구 난곡동의 한 허름한 교회 앞. 예배가 없는 평일이었지만 갓난 아기의 울음소리가 새벽 적막을 깨웠다. 이 교회 외벽 한쪽에는 아무 데나 버려지는 아기들의 생명을 구하고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한 '베이비박스'가 설치돼 있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저출산 문제를 해결 하자며 "아이를 더 낳자"는 절박한 호소가 연일 매스컴을 장식하고 있지만 다른 한 쪽에선 사연 많은 부모들이 아기를 버리고 간다.
이날은 하은(가명)이가 베이비박스를 통해 이 교회의 새 식구가 됐다. 박스가 열리는 순간 들리는 '딩동' 벨소리를 듣고 교회 상담사들이 부리나케 달려나와 아기 아빠를 붙잡았다. "제발 한번만 다시 생각해보세요." 상담사의 간절한 설득에도 아빠는 결국 도망치듯 떠나버렸다.
하은이처럼 베이비박스에 버려진 아이들은 국내외 입양 절차를 밟거나 영아원 같은 아동보호시설로 보내진다. 하은이를 보호하고 있는 박혜빈 주사랑공동체교회 상담사는 "가족들 몰래 아이를 낳은 미혼부모가 대부분이라 출생 신고를 한 경우가 드물다"고 말했다.
지난 2012년 8월 입양특례법이 개정된 뒤 아이가 입양을 통해 새 가정을 찾으려면 반드시 출생신고가 돼 있어야 한다.
이때문에 상담사들은 아기를 맡기고 떠나는 부모들에게 "제발 출생 신고만이라도 해달라"고 부탁하지만 현실적으로 이를 들어주는 경우는 거의 없다. 결국 출생신고가 돼 있지 않은 아이들은 대부분 아동보호시설로 보내져 입양 가정보다 더 열악한 환경에서 자라게 된다.
베이비박스는 난곡동 주사랑공동체교회와 경기 군포시 새가나안교회 등 두 곳에서 운영 중이다.
두 곳을 합쳐 지난 2010년부터 베이비박스에 버려진 아이만 모두 1149명에 달한다. 2011년 37명, 2012년엔 79명의 아이가 이곳들을 찾았다. 그러나 5년 전 입양특례법 개정으로 부모가 직접 출생신고를 하지 않으면 입양을 보낼 수 없게 되면서 그 수가 매년 200명 이상으로 급증했다. 버려진 아이 수는 지난 2014년 280명으로 최고치를 기록한 뒤 지난해 223명으로 다소 줄기는 했지만 여전히 법 개정 전보다 훨씬 많은 수준이다.
한 복지단체 관계자는 "미혼모들이 출산 후 몰래 갖다 버리는 경우나 통계에 잡히지 않는 아동보호시설, 종교시설 등에 맡기는 숫자까지 포함하면 실제 유기 영아 수는 이보다 훨씬 많을 것"이라고 했다.
정부가 과거 입양특례법을 개정한 것은 '아동 수출국'이라는 오명을 벗기 위해서였다. 실제 법 개정 전인 지난 2010년 1013명에 달했던 해외 입양자 수가 2015년 374명으로 크게 줄었다. 아이를 입양 보내기 전 출생신고가 의무화되고 제출서류가 많아지는 등 절차가 까다로워졌기 때문이다. 문제는 법 개정 전엔 아이들을 해외입양기관 등에 맡기던 부모들이 이제는 '베이비박스' 같은 곳에 버리는 사례가 늘었다는 점이다. 국내 입양을 독려하고 아이가 학대받을 가능성을 줄이기 위해 만든 법이 오히려 아이들을 더 나쁜 상황에 내모는 부작용을 빚고 있는 셈이다.
한 입양관련기관 관계자는 "싱글맘이나 싱글대디로 살아가기 힘든 사회적 현실이 아이를 포기하게 만드는 주된 이유"라며 "법적 제도로 입양이나 유기되는 아이를 줄이는 것은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초저출산시대에 걸맞은 미혼부모 관련 복지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지적한다. 출산을 장려하는 한편 우리 땅에서 태어나 버려지는 아이들을 보호할 수 있는 시스템도 절실하다는 것이다..
베이비박스를 운영하는 한 교회 상담사는 "아이를 버리는 미혼부모들은 대부분 보호자가 없거나 생계 능력이 떨어지는 저소득층"이라며 "진심 어린 조언과 함께 경제적 지원을 약속하면 고민 끝에 다시 아이를 찾아간 경우도 꽤 있었다"고 전했다. 실제 베이비박스를 찾았던 이들 중 10% 정도는 아이를 직접 키우기로 마음을 돌렸다고 한다.
조훈식 서울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선진국에선 미혼부모가 아이를 키우는 게 자연스럽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아직 사회적 시선이 곱지 않은게 사실"이라며 "무조건 '아이를 낳으라'고 종용하기 보다 태어난 아이들이 보호 받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해외로 보내지는 아이들 숫자가 줄기는 했지만 우리나라는 여전히 '아동수출국'의 오명도 벗지 못하고
[임형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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