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복싱계에서 주목 받고 있는 선수 A씨(36)가 최근 해외 원정 경기에서 거둔 승리 상대가 A씨 발표와 전혀 다른 인물로 확인돼 허위 승부 논란이 불거지고 있다.
매일경제 취재 결과 A씨 측은 인도네시아 선수와 겨뤄 18연속 KO승(총 27승 中)을 챙겼다고 발표했지만 실제 대결한 선수는 며칠 전 그에게 17연속 KO승을 헌사한 필리핀 선수였다. 직전 매치에서 이미 승리를 따낸 선수와 재대결하고도 이를 새로운 외국 선수와 붙은 것처럼 공식발표한 만큼 A씨 개인의 신뢰 문제는 물론 복싱계 전반의 허술한 경기관리에 대한 논란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사건의 발단은 지난달 19일이었다. A씨의 프로모터(소속 복싱선수의 경기를 주선하는 역할)인 B프로모션은 자사 SNS를 통해 “A선수의 18연속 KO승 소식을 전한다”는 발표를 했다. 이날 태국에서 이뤄진 경기에서 A씨가 인도네시아 국적 선수를 상대로 7라운드 KO승을 얻었다는 내용이었다. 또한 국제적인 복싱 경기 결과 관리 사이트(Boxrec.com)에도 같은 내용의 결과를 등록했다
이에 대다수 복싱팬들이 A씨의 기록적인 연속 KO승에 환영과 지지를 보내는 등 태국에서 날아든 낭보를 사실로 믿었다.
그러나 매일경제가 복싱업계 제보 등을 통해 취재한 결과 이날 A씨가 맞붙은 상대는 경기 결과에 기록된 인도네시아 선수가 아닌 전혀 엉뚱한 선수였다. 현재 한 복싱 관련 커뮤니티는 이 사건 관련 여파로 의혹 제기와 상호 비난이 쇄도하고 있는 상태다.
A씨의 3월 19일 경기 동영상을 확인한 복싱계 관계자는 “이날 경기는 (인도네시아 선수가 아닌) 같은 달 1일 앞서 A선수의 경기 상대로 뛰었던 필리핀 선수였다”고 확인했다. 이어 “이런 부분을 B프로모션 측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SNS에 승리 소식만 발표하고 이날 경기 동영상을 올리지 않았던 것 아니겠느냐”고 덧붙였다.
이 같은 의혹에 대해 B프로모션 대표는 매일경제와 만나 18승 상대가 공식 발표와 다른 필리핀 선수임을 자인하면서도 고의성이 없었다고 해명했다.
해당 대표는 “당일 경기를 참관하지 못해 태국 현지에서 매치메이킹(경기 주선)을 해주던 관장의 보고를 그대로 받아들였다”며 “나중에서야 현지에서 보내준 사진을 보고 동일 선수인지 알게 돼 우리도 관장에게 따졌다”고 오히려 억울해했다. 현재 경기 결과 관리 사이트 기록은 삭제된 상태다.
허위 발표를 한 뒤 언론 취재가 시작되자 이를 ‘실수’로 해명하는 B프로모션과 함께 사건 당사자인 A씨 역시 도덕적 책임을 피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3월 1일 싸워 17연승 기록을 챙긴 필리핀 선수를 18일만에 다시 만났음에도 A씨는 “인도네시아 ○○○○선수에게 KO승했다”는 B프로모션 발표에 침묵했다.
전문가들은 이런 문제가 불거지게 된 것에는 커미션(복싱 위원회, 국내 총4개 커미션 존재)의 관리 소홀이 한 몫했다고 지적한다. 커미션은 자국의 선수가 해외에서 원정 경기를 하기 전에 경기 계약서와 상대 선수의 경기전적표를 확인해야 할 의무가 있다. 경기 종료 후에는 경기가 이뤄진 현지국가의 커미션(이 경우에는 태국) 확인이 들어간 경기결과보고서를 프로모터로부터 제출받게 돼 있다.
취재 결과 A선수 등록 커미션인 한국권투위원회(KBC·회장 홍수환)는 당시 경기가 있기 전부터 경기 관리 감독에 소홀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당장 지난 달 14일 B프로모션 소속의 다른 세 명의 선수가 경기계약서도 없이 태국에서 경기한 것을 묵인했다.
KBC 관계자는 이에 대해 “선수들의 매니저가 급하게 출국을 하며 국제 타이틀 경기 내용을 구두로 보고하기에 관련 서류를 추후에 보완하라고 지시했다”고 해명했다.
이어 “우리 복싱계에 동양챔피언 하나도 없는 판국에 복잡한 절차를 모두 밟게 하며 발목을 잡을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또한 WBC 산하기구가 주최하는 경기인데 신뢰를 하는 게 당연한 것”이라고 답했다.
이러한 답변에 대해 국내 한 복싱 전문가는 “운전을 급하게 해야 하니 면허는 나중에 받으라며 KBC가 ‘무면허 운전’을 허락한 것이나 다름 없다. 경기계약서를 커미션에서 확인해주지 않으면 누구든지 WBC 이름을 팔고 ‘사기 경기’를 할 수 있게 된다”고 지적했다. 해당 경기를 치른 세 명의 선수 역시 경기 결과조작, 가짜 경기주선 의혹 등을 문제 삼으며 B프로모션과 KBC에 이의를 제기한 상태다.
아울러 KBC는 A선수의 3월 19일자 허위 보고 경기 이후에도 커미션으로서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다. KBC는 해당 경기에 대해 “우리의 승인 없이 이뤄진 경기”라며 “어떻게
복싱 전문가들은 “한국을 대표하는 복싱선수들이 해외에서 경기를 하는데 KBC가 사전 점검과 사후 검증을 철저히 하지 않아 결과적으로 A선수의 허위 경기 결과 발표를 가능토록 한 셈이 됐다”고 질타했다.
[박창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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