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석 선택창도 한 번 못보고 끝났어요. 결국 저 같은 '망손(느린 손)'들은 암표나 찾아야죠." 최고 인기 A 걸그룹의 '삼촌팬'을 자청하는 30대 이 모씨(31)는 지난달 20일 오후 7시 부푼 마음을 안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이날 오후 8시 이 씨가 응원하는 걸그룹의 첫 콘서트 예매가 있었던 것.
이 씨는 각 연예 기획사에 특화된 예매 프로그램과 난이도 설정까지 가능한 '티켓팅 연습하기 게임'을 이용해 예행연습까지 마쳤지만 실전에서는 결국 '예매 광탈(빛의 속도로 탈락)'을 맞봤다. 순간 공연 예매가 빠르게 마감됐다고 생각했지만 나중에 걸그룹 팬 카페 등에서는 다른 이야기가 나왔다.
일명 1초 만에 티켓 예매의 절차를 자동으로 처리해주는 '매크로(자동명령프로그램)' 이용자들이 판을 쳤다는 것. 단 한 번에 적게는 수 십장, 많게는 수 백 장까지 티켓을 선점하는 '클릭 전쟁'에서 '신의 손'이 따로 있다는 얘기였다.
실제로 치열한 초 단위 예매 전쟁이 끝나고 중고 티켓 장터에는 암표가 대량으로 쏟아져 나왔다. 결국 지난 17일 해당 걸그룹의 첫 콘서트를 2주 앞두고 이 씨 역시 웃돈을 주고 티켓을 샀다. 티켓 정상 가격은 9만 9000원. 하지만 이 씨는 티켓 구입을 위해 정상가의 두 배 가까운 돈을 줘야 했다.
최근 인기 공연과 설·추석 기차표 예약에 이어 대학교 수강신청에서도 예약 신청 접수와 동시에 티켓이 매진되고 강의신청이 마감 되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새벽 시간을 이용해 취소표가 풀리는 틈을 타 밤새워 예매 전쟁을 벌이는 '취켓팅(취소표 티켓팅)'이란 신조어까지 생길 정도로 온라인 예매 광풍이 불고 있는 상황이지만 정상적인 이용자들은 아무리 밤을 새워 클릭을 해도 도저히 티켓과 강의 신청을 잡을 수 없다는 불만이 커지고 있다.
'망손'들의 허탈감은 '광(狂) 클릭' 전쟁에서 자동으로 광속에 가깝게 정보를 입력해주는 소위 '매크로 프로그램'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웃돈벌이가 유행처럼 번지면서 더욱 커지고 있다. 특히 SNS에서는 상당수의 전문 암표꾼들이 이같은 프로그램을 이용해 활개를 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 지난해 11월 영국 인기 록밴드 '콜드플레이(Coldpaly)'의 내한 공연 티켓은 1분도 지나지 않아 동이 났고, 이후 티켓 시장에서 정가 4만 4000원짜리 표가 40~50만원에 거래된 사례가 속출할 정도로 시장이 교란 행위가 자행됐다.
20일 매일경제 취재 결과 인터넷 검색 포털에서 '티켓 매크로'를 검색하면 티켓 예매, 수강신청 등에 이용할 수 있는 매크로 프로그램을 쉽게 다운 받을 수 있었다. 특히 다수의 블로그나 웹문서, 유뷰트 등에서는 해당 매크로 프로그램을 사용해 티켓을 예매하는 방법을 알려주며 "누구든 매크로를 쉽게 사용할 수 있다"고 안내하고 있었다. 실제로 해당 매크로 프로그램을 이용해 영화 티켓을 사재기해 되팔아봤다는 이 모 씨(29)는 "인기 있는 공연이나 영화티켓의 경우 일단 사놓으면 무조건 비싼 값에 팔 수 있어 사재기가 심하다"며 "성능이 좋은 매크로는 돈을 주고 사고팔기도 한다"고 귀띔했다.
이어 "이런 사람들이 컴퓨터를 여러 대 사용해 예매를 하면 일반 소비자들은 당해낼 수가 없다"고 강조했다. 지난 2월 8일 국회 입법조사처에서는 '인터넷 매크로 프로그램의 문제점과 규제 개선 방안'이라는 보고서를 발표하면서 "처벌 조항은 있는데, 실질적인 적용이 어려운 상황"이라며 "법상 구체적으로 매크로 프로그램 등을 정의하고, 위반하는 경우 제재를 유도할 수 있는 조항 신설이 필요해 보인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미국의 경우 매크로가 공정 경쟁을 침해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 불법적인 프로그램을 이용한 온라인 티켓 구매와 재판매를 금지해 처벌하고 있다. 미국 뉴욕주의 경우 '예술문화법'을 근거 티켓 구매를 위해 의도적으로 매크로 프로그램을 사용하는 경우 500달러 이상 1,500달러 이하의 행정 벌금에 처하도록 규정하고 있으며, 이렇게 얻은 티켓을 재판매 하는 경우에도 행정 벌금과 함께 판매 수익금을 몰수
곽대경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국내에선 매크로 사용을 처벌할 명확한 규정이 없다 보니 편법적 행위가 방치되고 있다"며 "이같은 행위가 공정한 경쟁을 저해하고 선량한 소비자의 금전적 피해가 큰 시장질서 교란 행위인 만큼 관련법 정비가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유준호 기자 / 임형준 기자]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