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대북제재 수위에 대해 불만을 표시해 온 트럼프 정부가 마침내 중국 기업과 개인에 대한 독자적인 제재의 '칼'을 뽑아들었다.
미국 재무부는 29일(현지시간) 중국 단둥은행을 주요 자금세탁 우려 대상으로 지정하고, 다롄국제해운과 중국인 리홍리(53), 순웨이(35)를 북한 관련 제재명단에 등재했다. 한·미 정상회담을 불과 20시간 앞두고 발표된 이번 제재는 개성공단 재개 등을 거론하는 한국 정부를 향한 경고의 메시지로도 읽힐 수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재무부는 성명을 통해 "단둥은행은 북한 핵·미사일 관련 기업들이 수백만 달러의 금융거래를 할 수 있도록 도운 혐의가 있다"고 밝혔다. 리홍리는 베이징에 있는 북한 고려은행 대표 리성혁과 연루된 혐의를 받았고, 순웨이는 북한 외국무역은행(FTB)의 위장 회사를 운영했다고 설명했다. 리성혁은 이달 초 발표된 트럼프 정부의 제2차 대북제재 명단에도 포함된 인물이다.
주요 자금세탁 우려 대상으로 지정된 단둥은행은 미국 금융기관과의 거래가 즉각 차단된다. 단둥은행과 거래하는 제3국 금융회사들도 미국 은행과의 거래가 제한을 받는다. 미국 금융시스템 접근이 차단된 단둥은행은 북한 계좌를 동결하고 북한과의 거래를 중단할 수밖에 없을 만큼 큰 타격을 입을 것으로 보인다.
미국 정부가 '애국법 311조'를 근거로 외국 은행을 주요 자금세탁 우려 대상으로 지정한 것은 2005년 마카오 소재 방코델타아시아(BDA) 이후 12년 만에 처음이다. 지난 해에는 금융기관이 아닌 북한을 자금세탁 우려 대상국으로 지정한 바 있다.
BDA 제재는 역대 미국 정부가 취한 대북압박 수단 중 가장 큰 효과를 본 것으로 인정되는 만큼 이번 제재를 통해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 자금줄이 상당한 타격을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BDA는 자금세탁 우려 대상으로 지정되자마자 북한 계좌 2500만 달러를 동결시켰으며 중국 내 은행 등 24곳이 북한과 거래를 끊은 바 있다.
북한 관련 제재명단에 오른 다롄국제해운과 리홍리, 순웨이는 미국 내 자산이 동결되고 미국인 및 미국 기업과의 거래가 금지된다. 이는 미국인과 미국 기업이 아닌 제3국 개인과 기업에 대해 미국이 제재를 가한 것으로 사실상 '세컨더리 보이콧'에 해당한다.
리홍리, 순웨이는 물론 다롄국제해운이 미국 내 자산을 보유하고 있지 않고, 미국인 또는 미국 기업과의 거래가 없기 때문에 실질적인 제재 효과는 미흡하다. 하지만 미국이 경고했던 대로 중국인과 중국 기업에 대해 사실상의 세컨더리 보이콧을 가했다는 점에서 상징성이 크고, 중국은 자존심에 상처를 입게 됐다.
스티브 므누신 재무장관은 이날 백악관에서 브리핑을 하고 " 북한을 돕는 개인과 기업, 금융회사에 대해 주저없이 제재한다는 단호한 메시지를 보낸다"면서 "북한이 핵·미사일 프로그램을 포기할 때까지 압박을 극대화하고자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미국 재무부의 이같은 결단은 중국과 한국 양국 모두를 향한 단호한 경고의 메시지로 풀이된다.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 핵·미사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중국으로 하여금 북한을 압박하도록 하는 전략을 추구해 왔으나 중국 정부의 태도와 노력이 만족스럽지 못하자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직접 제재에 나선 것이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대북제재 노력에 기대를 걸었던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20일 "중국의 노력이 제대로 통하지 않고 있다"고 언급한 후부터 미국 정부는 전방위적으로 중국 압박에 나섰다.
미국 상무부가 중국산 철강 제품에 추가 관세를 부과하는 등 무역 제재를 검토하기 시작했고, 국무부는 중국을 4년만에 최악의 인신매매 국가로 지정했다. 또 중국으로서는 상당히 민감한 대목인 대만에 미국 무기 수출을 승인했으며 연방의회는 미국 항공모함이 대만을 기항지로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법안을 처리했다.
니키 헤일리 유엔 주재 미국 대사는 전날 하원 외교위원회 청문회에서 "중국이 대북제재를 충분히 하지 않고 있다"면서 "우리가 세컨더리 제재를 해야 한다면, 그렇게 할 준비가 돼 있다"고 지적했다.
미국 정부의 이같은 조치가 문재인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의 첫 만남 직전에 나왔다는 점이 예사롭지 않다. 환경영향평가 절차를 이유로 사드 시스템 완전 배치를 지연시킨 것이나, 개성공단 재개 방안이 거론되고, 북한과의 대화 필요성이 언급되는 것 등을 겨냥해 경고의 메시지를 보낸 것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 정가에서는 한국 내 사드 논란과 문정인 청와대 통일외교안보특보의 파격 발언으로 불편한 심기를 표시해 왔으며, 북한에 억류됐던 미국인 대학생 오토 웜비어 사망을 정점으로 북한에 대한 분노와 한국에 대한 서운함이 고조됐었다. USA투데이와 서포크대학이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미국인 49%가 웜비어 사망과 관련해 대북조치가 필요하다고 답했고 35%는 이에 반대했다.
헤일리 유엔 주재 대사는 그러나 이날 하원 외교위 청문회에 출석해 문재인 대통령과 관련한 질의를 받고 "한국 정부가 사드 배치를 검토하는 것에 대해 매우 신중했지만, 최근 여러 단계에 걸쳐 북한과 멀어지고, 미국과 가까워지는 행보를 보였다"고 평가했다.
한편 미국 국방부가 북한 핵 문제와 관련해 대북 군사옵션을 마련했으며 트럼프 대통령에게 최종 보고할 준비를 마쳤다고 CNN 방송이 복수의 국방부 관계자를 인용해 보도했다. 이들 관계자는 "북한이 지하 핵실험 또는 탄도미사일 시험발사를 감행한다면 군사적 대응을
허버트 맥마스터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도 지난 28일 신미국안보센터(CNAS) 주최 컨퍼런스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군사적 옵션을 포함해 다양한 대북조치 방안을 준비하도록 지시했다"고 밝힌 바 있다.
[워싱턴 = 이진명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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