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보적인 서정주의 추상 작가였던 류경채 화백의 생전 모습. |
자존심 없는 예술가가 누가 있으랴마는 그는 유독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화가였다. 해방과 6.25 전란에서도 가난과 담배를 씹어 물면서 예술에 대한 남다른 집념을 불태웠다. 한국 화단에 독보적인 서정주의 추상 작가로 분류되지만 '잊혀진 거장'에 가까운 류경채(1920~1995) 화백이다. '류경채의 추상회화 1960-1995'展이 서울 사간동 현대화랑에서 열린다. 현대화랑에서 그의 개인전이 열린 것은 26년만이다.
생전 그는 두 차례의 개인전밖에 열지 않았다. 예순 셋의 나이였던 1983년 춘추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고 1990년 현대화랑이 두번째이자 마지막 개인전이었다. 찾아주는 화랑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제자인 유희영 작가(전 서울시립미술관장)는 "아마도 극도의 결벽주의와 완벽주의 성격 때문인 것 같다"고 추측한다.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난 류경채는 일본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사범학교 교편을 잡는다. 서른 살 즈음인 1949년 해방 후 처음으로 열린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에서 서울 왕십리 야산을 그린 '폐림지 근방'으로 대통령상을 받아 단번에 스타가 된다. 1950~60년대 사슴과 비둘기, 해바라기를 그린 구상 작품은 세련된 색채와 표현주의적인 계열 작품으로 지금도 걸작으로 평가 받는다. 당시 그는 수상 소감에서 "비록 늦은 감이 없지 않으나 한국 화단에서도 자연 대상의 재현으로써의 사실적인 양식에서 표현주의적인 양식에로의 전환, 객관적 사실에서 주관 표현으로의 전환을 공인한 하나의 계기"라고 자평한 데서도 적잖은 자부심이 읽힌다.
그후 이화여대와 서울대에서 교편을 잡고, 미술교과서 저술에도 참여해 안정적인 생활 기반을 마련한 그는 조형실험에 오롯이 매진한다. 유화만 평생 200여점을 남겼으며 그것도 최소 50호 이상의 대작들이었다. 드로잉도 적을 뿐더러 그 흔한 과슈나 수채화 작품도 거의 없다고 유족 측은 밝혔다. 밀도와 완성도를 중시하느라 적게 그리는 과작(寡作) 작가를 자처했다는 후문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구상에서 탈피해, 비구상과 추상으로 빠진 1960년대 이후부터 말년작까지 30여점을 선보인다. 세월이 흐를수록 구체적인 형태가 지워지고, 말년에는 다소 엄격한 기하학적 추상 작업에 몰두했지만 그 기저에는 따뜻한 '서정성'이 자리잡고 있다. 도형태 갤러리현대 대표는 "초창기 자연을 그리던 순수한 감성이 추상 작업으로 바뀌고 나서도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작가는 생전 "서울풍경을 그리면서 그림이 잘되지 않아 화폭을 지워보니 오히려 원하는 그림이 됐다"며 "추상은 마음에 비치는 심상의 에센스를 표현하는 것"이라고 고백하기도 했다. 일본에서 유학한 경력이 있지만 오히려 토속적인 작가에 가까웠다는 평가다. 당시 한묵과 남관, 김환기 등이 파리에서 수학하며 서구적 조형언어를 화폭에 적극 수용한 것과는 차이가 있다는 얘기다.
'하지' '중복' '초파일' '단오' 등의 절기가 작품 제목에 많이 등장하는 것도 친근감을 준다. 1960년대 격정적이고 표현주의적인 붓질은 1980년대 중반 이후 간결해지고 차분해진다. 원과 사각형, 마름모 형태로 구성된 기하학적 추상 작업은 주로 보라색과 붉은색으로 표현되며 숭고한 느낌을 준다. 그는 어떤 유행과 사조에 속하지 않았다. "예술가라는 것은 순교자와 수도승과 같은 존재입니다. 남몰래 노력하고 남몰래 심혈을 바쳐 자신을 깨닫는 것이 예술입니다. 어느 틀에 맞춰서, 어느 유행을 좆아서, 어느 경향을 재빨리 수입하는 이런 것들이 아니에요."
타계한 뒤에도 2002년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
[이향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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