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였을까. 그녀가 TV 앞에 등장하면 묘하게 시선이 끌렸다. 때로는 오싹했고, 때로는 아련했다. 처연해 보이는가 하면 눈물이 나기도 했다.
SBS 종영 드라마 '마을-아치아라의 비밀'에서 극강 존재감을 뽐낸 김혜진 역, 배우 장희진을 만난 순간의 감상이다.
'마을-아치아라의 비밀'은 암매장되었던 시체가 발견되면서 평화가 깨진 마을인 아치아라의 비밀을 그린 스릴러 드라마로 장희진은 극중 미술학원 교사 김혜진 역으로 분했다. '혜진쌤'의 자취를 좇던 많은 이들의 얽히고 설킨 관계 속에서, 그녀와 아치아라의 슬픈 비밀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호평 속에 드라마를 마친 장희진은 매일경제 스타투데이와 인터뷰에서 "감독님이 ‘시청률 빼고 완벽했던 드라마’라 하셨는데, 제 생각도 마찬가지"라며 아치아라에서 보낸 지난 3개월을 떠올렸다.
"('마을' 전에 출연했던) '밤을 걷는 선비'는 욕심을 많이 갖고 시작했던 작품이라 끝날 때 쯤 힘들었어요. 그러던 중 '마을' 대본을 받았죠. 대본은 재미있는데 그 안에서 역할이 크진 않았어요. 시놉시스상 캐릭터 설명도 짧았고, 가볍게 들어간 작품이었는데, 이렇게 존재감이 커질 줄은 몰랐어요. 한두 씬 나와도 한 시간 내내 저를 본 것 같은 느낌을 줬으니, 캐릭터적으로 정말 좋았죠."
장희진의 말처럼, 현장에선 '카메오 배우'라는 농을 들을 정도였음에도 극중 김혜진의 존재감은 그야말로 '극강'이었다.
하지만 세상에 공으로 얻는 것은 없듯, 짧은 등장이 주는 강렬함을 표현하는 것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짧은 등장이었기에 더욱 임팩트 있고 강렬해야만 했다.
"제 씬들은 다 누군가의 회상이었거나, 필요해서 들어간 씬들은 모두 임팩트가 있어야 했죠. 감정씬이든 싸우는 씬이든 일상 연기가 아니었기 때문에 힘들었어요. 한 씬 한 씬 공들여 찍어야했고, 그게 잘 표현되어야 부담감은 있었어요."
"사람들이 유독 이 작품에서 왜 날 예쁘게 봐주실까 생각했어요. 기존 캐릭터들은 짝사랑이거나 사랑을 갈구하거나 화내거나, 울거나 화내거나 짜증내는 씬이 많았는데, 이번 작품에선 뭔가 분위기 있고, 웃는 모습으로 나오니까 그런 게 예뻐보인 게 아닐까 싶어요. 아, 연기의 표정이나 분위기가 배우에 대해 많이 좌우하는구나 많이 느꼈죠. 제가 봐도 감독님이 예쁘게 찍어주시려 하셨거든요. 특히 조명감독님, 사랑합니다. 하하."
극중 윤지숙(신은경 분)은 어린시절 성폭행을 당해 딸을 낳았다. 멀리 입양보낸 딸(김혜진)은 범죄자인 혈연적 아버지의 악행을 들추기 위해 마을에 돌아왔다. 하지만 이같은 사실이 드러나길 원하지 않던 엄마 지숙과 맞선 사이, 범인의 아내 남씨에게 죽임을 당했고, 둘은 시체를 암매장하며 '공범'이 됐다.
어느날 갑자기 발견된 이 시체는, '마을-아치아라의 비밀'의 출발점이었다. 마을로 돌아온 김혜진의 행보가 장희진은 이해가 됐을까.
"김혜진을 이해하면서 찍으려고 했지만, 스토리가 이어진 게 아니다 보니 한 씬으로 많은 것을 유추하고 생각하면서 찍어야 했어요. 대사 한마디 한마디가 중요한 단서가 되기 때문에, 허투루 하면 안 됐죠. 거기에 어떤 느낌을 담느냐가 관건이고, 어떤 느낌 담느냐에 따라 캐릭터가 드러나니까요. 왜냐면 저는 범인도 몰랐고, 아예 전혀 그런 것에 대한 힌트를 안 주셨기 때문에 '이럴 것 같아' '이런 의도로 했겠다' 정도였었죠. 다행히 끝으로 갈수록, 제가 생각했던 게 맞았지만요."
하지만 그녀 역시 범인의 정체에 대해선 전혀 모르고 있었다. "범인이요? 대본 보고 알았어요.(웃음) 막판에 대본이 좀 밀려 현장에서 받아봤는데, 너무나 격렬한 감정씬에 대사량도 많은, 아주 중요한 장면이었던 거예요. 사실 이 장면을 위해 달려온 것 같은데, 망치면 안되겠다는 마음으로. 알게 됐죠."
"작가님께 정말 놀랐어요. 4~5회까지 쫀쫀하게 가다가 어느 순간부터 힘이 빠지곤 하는 게 보통의 드라마 현실인데, 뚝심 있고 치밀하게 준비하셨더라고요."
마지막 편 대본을 받고는 눈물까지 쏟았단다. "대본 보고 울었던 게, 지숙 캐릭터가 너무 이해가 되더라고요. 교도소에서 자신의 아픔을 끄집어내 이야기하는 걸 보면서, 나라도 저럴 수 있었겠다 싶은 마음마저 들었죠. 혜진이는 아마도, 엄마 사랑 받고싶었겠죠? 그러면서도 여자로서 엄마를 이해하는 마음에, '엄마 안녕' 하고 돌아선 모습에 사랑한다는 속뜻이 있다고 생각해요."
'제2의 전지현'이라는 뜨거운 관심 속에 배우로 데뷔한 지 어언 13년. 스포트라이트는 화려했지만 때로는 그림자도 그만큼 짙었다. 배우로서 스스로의 포지션에 대한 치열한 고민을 거듭한 끝에 찾은 답은, '내려놓음'이다.
"한창 슬럼프도 있었고, 쉽지 않게 여기까지 온 건 사실이에요. '왜 안 되지?' 이런 마음이 클 땐 더 잘 안 됐는데, 마음을 좀 비우고 꾸준히 가는 것에 만족하자 생각한 순간부터 사랑받기 시작했어요. 예전에는, 주인공 서브를 하고 싶었어요 비중도 어느 정도 있어야 했고, 처음 주연으로 시작해서, 두려움도 있고 압박감도 있고, 내가 거기에서 주연이냐 아니냐를 많이 생각을 하면서 작품 선택을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마음을 내려놓고, 캐릭터와 작품을 보기 시작했죠. 그러니까 오히려 사람들이 봐주시더라고요."
‘아치아라’와 함께 한 가을의 뜨거웠던 기억을 가슴에 묻고, 장희진은 벌써 새로운 작품으로 시청자를 만난 준비를 하고 있다. '냉정'과 '열정' 사이 그 어딘가, 장희진의 매력이 다시 한 번 빛을 발할 드라마를 만날 준비를 하고 있어야겠다.
psyon@mk.co.kr/사진 유용석 기자[ⓒ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