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N스타 금빛나 기자] “최근에 좌우명이 바뀌었어요. 어렸을 때는 ‘오만은 나의 힘’이었는데, 이제는 ‘항상 더 새롭게 항상 더 낫게’가 됐어요. 요즘 들어서 약간 강박이 된 것 같기도 하지만, 전보다 더 좋은 연출가가 되고 싶어요.”
이상한 괴짜교수 마슈칸과 자기 세계에만 갇혀있는 피아니스트 스티븐 호프만, 두 유태인 남자의 이야기를 다루는 연극 ‘올드 위키드 송’의 이야기는 오스트리아 빈, 어느 대학의 음악 연습실에서 시작된다.
‘올드위키드송’의 시대 배경은 1986년의 어느 봄날, 나치 전범 이력을 의심받는 쿠르크 발트하임이 오스트리아 대통령으로 선출되던 때이다. 우울하면서도 어수선한 시대의 분위기는 무대 위 낡은 피아노와 우중충한 날씨를 그대로 보여주는 넓은 유리창, 그리고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멈춰버린 로코코풍의 시계가 대신한다. 곧 이사를 떠날 듯 휑하면서도 짐이 어수선하게 쌓여있는 마슈칸과 스티븐의 음악연습실은 치유되지 못한 상처를 품고 있는 이들의 마음을 대변하듯 그 모습이 꼭 닮아있다.
‘올드위키드송’의 허전한 빈자리는 슈만의 연가곡 ‘시인의 사랑’이 채운다. ‘올드위키드송’은 음악극이라고 불릴 정도로 음악이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높다. 연극의 시작부터 끝나는 순간까지 흘러나오는 아름다운 클래식 음악은 두 남자의 심리적인 변화를 알려주며 긴장감을 높이기도 하고 때로는 긴장을 완화시켜주는 작용을 한다.
생김새도 성격도, 특성도 그 어느 하나 닮은 곳 없는 두 사람의 유일한 공통점은 유태인이라는 것이다. 과거 다하우 수용소에서 살아남았던 마슈칸은 지울 수 없는 과거의 흔적에, 그리고 미국에 살며, 스스로 유태인임을 숨기며 살아가는 스티븐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세대들의 고민과 상처를 품고 살아간다.
묵직하지만 무겁지 않고, 쉽지는 않지만 어렵지 않은 상처의 치유과정을 다루는 ‘올드위키드송’은 현 시대 대한민국을 살아가고 있는 이들에게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라이선스 작품에, 독일어가 많이 등장하고, 우리와 거리가 먼 유태인들의 이야기이지만 청산되지 않은 과거의 아픔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만큼은 우리의 이야기와 동일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올드위키드송’에서는 한국과 일본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는 각색 없이 원작 그대로 번역한 것이다.
마슈칸과 스티븐을 통해 치유와 공감을 이야기하며 관객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고 있‘올드위키드송’의 김지호 연출가를 만나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 테이블 작업만 5주, 철저하고 공부하고 준비한 ‘올드위키드송’
↑ 사진=쇼앤뉴 |
‘올드위키드송’은 많은 공부가 필요한 작품이다. 작품에서 보여주고 있는 텍스트 외에도, 그 이면에 있는 시대적인 배경과 역사적으로 유태인들이 가지고 있는 아픔, 그리고 극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클래식 ‘시인의 사랑’에 대한 이해까지. 그나마 단순히 보고 느끼는 관객들은 다행인 셈이다. 무대 위 배우들의 대사에는 독일어가 심심치 않게 등장하며, 피아노로 ‘시인의 사랑’을 연주해야 하며, 심지어 뮤지컬도 아닌데 노래까지 불러야 한다.
“저 역시 많은 공부가 필요했다. 가곡과 독일어가 정말 어렵더라. 그래도 정말 다행인 것이 이 작품을 하면서 독일어 선생님을 만났는데, 그 분이 독일인이면서 한국인인 분이셔서 언어적인 영역뿐 아니라, 우리가 모르는 독일의 역사적 사실까지 접할 수 있었다. 독일은 과거의 역사에 대해 철저하게 교육을 받는다고 하더라. 선생님의 추천을 받아 배우들과 함께 홀로코스트의 참사라든지 독일과 유태인 다큐멘터리를 함께 보고 배우며 작품을 만들어나갔다.”
‘올드위키드송’은 유독 테이블 작업이 길었던 작품을 잘 알려져 있다. 총 9주의 제작과정 중 사전작업만 5주가 걸렸으며, 본격적인 연습은 한 달이라는 시간이 지난 이후에 겨우 들어갈 수 있었다.
“연습기간, 연습실의 벽과 바닥, 의자 등 독일과 유태인의 참상을 프린트한 종이를 가득 붙였다. 어디를 둘러봐도 그때의 아픔을 느낄 수 있도록. 그리고 그 중간 중간에 유태인화가 클림트의 작품이라든지 비엔나의 화려한 부분을 보여주는 그림들을 사이사이에 넣어 작품에 몰입할 수 있도록 꾀했다. 유태인의 이야기를 다루기는 하지만, 유태인이라는 것은 표면적인 부분일 뿐, 그 이면에 있는 민족적 아픔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들의 슬픔과 아픔을 다루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공부는 필수였다.”
연습실을 참사 사진으로 너무 과하게 꾸며 배우들에게 ‘우울해서 못하겠다’는 소리를 듣기도 했지만, 이 같은 김지호 연출의 과함은 결과적으로 작품에 적절하게 녹아들며 ‘올드위키드송’의 완성도를 높이는데 일조했다.
“매 작품이 그랬지만 ‘올드위키드송’으로 방점을 찍고 싶었다. 모든 것을 다 쏟아 부었고, 그만큼 각별함이 있다. 할 일도 많았고 섬세한 작품이라서 예민하게 시작을 했는데 우려보다는 나쁘지 않게 나온 것 같다. 잘 올라가서 다행이고, 무엇보다 어린 연출가의 의견을 존중해 주면서 잘 따라준 배우들에게 감사하다. 처음 하는 독일어가 낯설었을 것 같은데, 정말 잘 해주는 것 같다. 배우들 중에서 독일어는 우리 배우들이 제일 잘 하는 것 같다.(웃음)”
◇ “낡아 보인다고요? 이만한 최첨단이 없어요”
↑ 사진=쇼앤뉴 |
‘올드위키드송’의 무대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세월의 흐름을 그대로 받은듯한 낡은 피아노와 찌든 먼지 때가 낀 거대한 유리창이다. 보기에는 허름하지만 알고 보면 피아노와 유리창은 ‘무대기술의 정점’이라고 불릴 정도로 최첨단을 달리는 고가의 장비다.
“어떤 장면은 배우들이 직접 피아노를 연주하고, 어떤 부분은 기술적인 영역의 도움을 받는데 이러한 부분을 도와주는 비빌 장치가 바로 ‘피아노’다. 겉보기와 달리 피아노가 최신 전자 피아노다. 버튼을 누르면 그랜드 피아노 소리가 나고, 어떤 부분을 누르면 미리 녹음된 연주가 나오기도 한다. 암전에 나오는 음악 역시 이 같은 피아노 덕분에 어색함이나 삐걱거림 없이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었다.”
진짜 오래된 것처럼 보이는 유리창 역시 기술의 힘을 빌린 최첨단 장비 중 하나다. ‘올드위키드송’에서 독특한 것이 실제 다락방의 유리창을 보는 듯 창밖의 날씨를 제대로 표현했다는 것이다. 마슈칸과 어느 정도 관계가 현성된 스티븐이 여행을 떠나기 전, 거센 폭풍우를 뚫고 마슈칸의 음악연습실을 들리는 장면에서, ‘올드위키드송’의 날씨표현은 정점을 이루게 된다. 세차게 내리는 빗물이 유리창을 때리는 장면을 보고 있노라면, 필요 없는 우산을 찾을 정도로 실제와 흡사하다.
“날씨의 표현은 정서의 전환을 위해 꼭 필요한 부분이었다. 날씨라는 것은 만국 공용어이다. 비를 보고 받는 일반적인 정서가 있는데 그 정서는 어떤 대상과 음악보다도 정확하다. 정서를 이어가기 위해 비의 소리가 꼭 필요했는데, 아무리 좋은 음향 효과라도 진짜 비 소리와 다르다. 연출적인 욕심으로 진짜 비의 소리를 들려주기를 바랐고, 이에 회사에서 실제 이를 구현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이 같은 장치를 관리하는 비용이 적지 않은데, 회사에서는 큰 결정을 내려준 것이다. 빗물을 관리하고 소독하느라 고생하는 스태프들에게도 미안하고 또 고맙다.”
◇ “연극 ‘올드위키드송’, 감각적으로 더 감각적으로…”
↑ 사진=쇼앤뉴 |
실제로 만져보는 ‘촉각’은 채우기 어렵지만, ‘올드위키드송’은 오감 자극을 목표로 나온 작품이다.
“오감이 잘 녹아 들어들 수 있도록 꾀했다. 소리와 냄새, 보는 것 뿐 아니라, 커피와 패스트리를 보면서 입맛을 다실 수 있었으면 했다. 만지는 것까지는 잘 모르겠는데 최대한 감각적으로 다가가고 싶었다. 연극은 드라마 전개로서 감동을 이뤄내는 반면, 뮤지컬은 음악적인 요소를 활용해 더욱 감각적으로 풀어낼 수 있다. ‘올드위키드송’이 뮤지컬은 아니지만 최대한 음악적인 요소를 부각해 감각적인 부분을 살리고자 했다.”
어떻게 하면 연극적인 특성 안에서 4D공연을 만들 수 있을까 고민했다고 밝힌 김지호 연출은 이에 대한 대책으로 공연장에 커피 향을 가득 채우기도 했다. 물론 환기 및 냉방, 그리고 안전상의 이유로 공연 일주일 만에 끝나기는 했지만 말이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공연 초반 공연장에 커피 향을 가득 채우며 관객들을 맞이하기도 했다. 비록 관객들의 편의와 공연장의 안전, 그리고 스태프들이 지나치게 고생을 해 삭제를 하기는 했지만…최대한 비와 커피와 음악과 이런 것들을 어우러져서 가을에 어울리는 연극을 만들고 싶었다.”
최대한 감각적인 연극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한 김지호 연출이 ‘올드위키드송’에서 내용적으로 가장 강조한 부분은 바로 공감이었다.
“마슈칸이든 스티븐이든 상처받기 싫어 ‘자신의 방’에서 나오지 않으려고 했다는 부분은 동일하다. 느끼는 것은 관객들의 영역이지만 그럼에도 연출가로서 꼭 하나 바라는 것이 있다면 바로 나의 상처를 누군가와 함께 치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2014년 가을 ‘데스트랩’으로 입봉한 김지호 연출은 2년차, 작품으로 치면 다섯 번째 작품을 올린 31살의 젊은 연출가이다. 걸어온 길보다 걸어갈 길이 많은 김지호 연출에게 앞으로의 목표에 대해 물어보았다.
“정확히는 입봉한지 1년이 됐다. 실은 10년 후에도 계속 왕성한 작업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고, 저만의 색깔을 알 수 있는 작품을 할 수 있었으면 한다. 이러한 부분이 때로는 강박이 되는 것 같기도 하지만, 작품을 올릴 때마다 전보다 더 좋은 연출가가 되고 싶다.”
금빛나 기자 shinebitna917@mkculture.com / 페이스북 https://www.facebook.com/mbnstar7 디자인=이주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