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희(김민희) : “사진을 왜 찍는 거예요?”
클레어(이자벨 위페르) : “무언가를 바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모든 것을 아주 천천히 다시 쳐다보는 겁니다.”
사진 찍기를 즐기는 클레어(이자벨 위페르)는 누군가 자신의 사진에 찍히고 나면 그 사람은 어떻게든 변한 것이라고 말한다. 사진에 찍히는 순간의 당신과 지금의 당신은 다른 사람이라는 것. 자신을 찍은 홍상수 감독은 그래서 어떤 다른 사람이 돼 있는 것일까. 아주 천천히 다시 쳐다보며, 무엇을 바꾸고 싶었던 걸까.
지난해 칸에서 촬영, 1년 후 칸에서 공개된 뒤 (현지에서) 극찬 사례를 받은 ‘클레어의 카메라’가 이번엔 국내에서 공개된다. 러닝타임이 한 시간을 조금 넘는 69분, 단순한 듯 복잡하고 부도덕하지만 순수하고 정직한 홍 감독의 자백이 소소한 듯 무심하게, 아기자기하게 담겼다.
영화사 직원으로 일하는 만희(김민희)는 칸영화제 출장 중 대표 양혜(장미희)로부터 갑작스럽게 해고 통보를 받는다. “순수한 줄 알았지만, 그것이 정직을 담보로 하진 않더라”라는 게 이유였다. 그렇게 생각하게 된 이유는 말 해 줄 수도, 중요하지도 않지만 자신이 판단하기에 너(만희)는 부정직하다는 것.
영문을 몰라 답답하던 만희는 이후 자연스럽게 깨닫게 된다. 양혜의 오랜 동료이자 연인인 영화감독 완수(정진영)와 술김에 보낸 하룻밤 때문이다.
우연의 연속인 이들의 칸 일정 속에서 각 인물을 연결하는 외부인 클레어(이자벨 위페르)에 주목해보자. 파리 출신 교사인 클레어는 칸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고, 그 와중에 만희를 만난다. 그녀를 해고한 대표 양혜를 만나며 완수와도 대화를 나눈다.
클레어에게 세 사람 모두는 이방인이지만 그녀가 가장 깊이 교감하는 상대는 만희다. 하룻밤 실수는 별거 아니라고 쿨한 척 말하지만 뒤로는 하루 아침에 보석이라 부르던 만희를 해고하고 질투를 숨긴 채 부정직을 논하는 양혜는 이상하고, 스스로 ‘꼴이 우습다’고 말하는 완수는 낮부터 만취해있는 주정뱅이다.
하지만 클레어의 눈에 만희는 아름답고 친절하고 좋은 사람이다. 서로의 예술혼에 대해 존중하고 찬사를 아끼지 않으며 스스럼없이 그것을 나눈다. 한국 음식을 먹어 본 적이 없다는 그녀에게 선뜻 음식을 대접하고, 현재의 고민도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양혜에게만은 질투의 대상이지만 그것이 곧 만희 자체는 아니다. 만희를 찍고, 그녀를 천천히 살펴 본 클리어가 내린 결론은 전혀 다르다.
이 역시 홍 감독과 김민희의 ‘불륜’을 의식한다면 ‘김민희 찬가’로 해설될 수 있는 여지가 있지만, 사실 영화 속 인물들의 우연과 이로 엮인 이야기에 보다 집중하면 보다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순수함과 거짓에 대한 희극을, 불안전성과 짧은 만남 그리고 우연의 연속이 빚어내는 마법 같은 삶의 조각들을 발견할 수 있다. 클레어가 찍은 다양한 사진들의 향연은 삶의 모든 가능성의 포착이며 자기성찰과 반성을 가능케 한다.
무엇보다 두 여배우의 호흡은 기대 이상이다. 외국에서 우연히 마주친 만남에서 어색한듯 편안하게 깊숙이 소통하고 교감하는 이들의 모습은 순수 그 자체다. 인간관계에서 말하는 ‘깊이’에 대한 모순과 선입견을 뒤집어 놓는다. 그들의 대화에 빠져 들어가다 보면 아무것도 아닌 만남들과 우연, 소소한 일상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사건들이 유난히 흥미롭게, 가치 있게 느껴지기도 한다.
관객이 직접 현장에서 이들의 이야기를 엿듣고 훔쳐보는 듯, 홍 감독 특유의 카메라 워크나 주변 소음까지 그대로 날것으로 담아내는 꾸밈없는 촬영 기법은 이번에도 변함이 없다. 어색한 듯 보다보면 듣다보면 중독되는 대사들과 소소한 유머, 뻔뻔할 정도로 솔직한 홍 감독의 자기 고백도 여전하다.
다만 쉽고 소소한 소동극을 즐기다 보니 여운의 깊이는 다소 얕다. 홍 감독과 김민희의 사생활을 절로 잊게 할 정도의 킬링 포인트나 신선함은 없다. 모든 구설과 선입견을 내려놓고 천천히 살펴보고 세밀하게 뜯어볼 애정이 국내 관객들에게 남아 있을 지도 미지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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