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시절, 가요계에 야심차게 출사표를 던졌지만 반짝 스타로 사라진 가수들. 혹은 한 시대를 풍미했지만 돌연 대중들의 곁에서 사라진 이들의 발자취를 쫓는다. 사라진 것들의 그리움에 대하여… <편집자 주>
↑ 사진=김승진 기자 |
[MBN스타 박정선 기자] 17살, 어린 나이에 가수의 길을 걷기 시작한 노아(김준파)는 겪어서 좋을 것 없는 세상의 불합리한 꼴들을 수도 없이 겪어왔다. 그러다 돌연 대중들의 곁을 떠난 노아,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노아를 찾아가기는 비교적 쉬웠다. 최근 미국 최고의 프로듀서와 아시아 퍼블리싱 독점 계약을 맺는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는 골자의 보도자료가 배포됐다. 그런데 보도자료 속 주인공의 이름이 왠지 익숙했다. 바로 가수 노아였다. 지금은 개명한 후 김준파로 살고 있는 그는 피넘엔터테인먼트(PhenomENT)의 대표 자리에 앉아있었다.
◇ 10대 “음악, 직업이 되다”
서울 은평구의 한 고등학교 유명 스쿨밴드 ‘창세기 밴드’를 찾아간 노아, 그렇게 그의 음악 인생이 시작됐다. 한 카페에서 4만 원 가량의 페이를 받으며 첫 무대를 경험한 이후 고등학교 3학년, 오디션을 전전하던 중 서인기획(당시 김건모, 솔리드, 이은미 등이 속한 소속사)에 들어갔다. 그렇게 본격적으로 가요계에 발을 들인 그였다.
98년, 노아는 야심차게 1집 데뷔앨범 ‘러브 포에버’(Love Forever)로 데뷔했고, 이듬해 2집 ‘언아더 프로미스’(Another Promise)를 발매했다. 빼어난 가창력을 소유한 노아였지만, 사실 대중들에게 크게 매력을 어필하지는 못했다. 상업성보다 자신의 색깔을 유지해왔기에 소수의 팬들이 존재했을 뿐이었다.
“당시 활동을 정말 열심히 했어요. 심지어 행사를 하면 일주일 동안 서울 땅을 못 밟았어요. 하루에 적게는 2개, 많게는 4개를 돌아요. 거의 투어죠, 행사투어(웃음). 그런데 5위까지 올라가봤는데 1등은 한 번도 못해봤어요. 단 한 번도요. 그때 저의 앨범을 도와줬던 형이 ‘내가 5000만 원이 없어서 1등을 못 만들어줬다. 미안하다’고 하더라고요. 물론, 농담이었죠.(웃음)”
◇ 20대 “아프니까 청춘이다”
노아가 메인스트림에 데뷔한 98년도는 스물이 되던 해였다. 안타깝게도 그의 20대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데뷔 앨범을 내고 소속사 관계자들이 잠적하고, 다시 의기투합해 만든 2집 앨범 이후 또 한 번 버림받았다. 결국 몸담고 있던 소속사와의 계약을 해지하고 2000년 다른 소속사에 맡겨졌다.
“소속사를 옮기고 줄곧 앨범 준비만 했어요. 그때 제가 준비하던 곡들이 있는데 그걸 다른 가수들이 앨범 수록곡으로 쓰더라고요. 자두, 알리, 왁스 등(사실, 오래 전 일이라 정확히 기억을 해내지 못했다). 근데 제 인생그래프 만든 거 보니까 죄다 망한 것밖에 없네요?(웃음)”
그의 말대로 죄다 안 좋은 일들 천지였다. 심지어 새 소속사에서는 앨범 준비만 하다가 발매도 하지 못하고 또 한 번의 이별을 겪어야했다. 아이러니한 것은 소속사에서 나가 홀로 행사를 뛰던 시절, 경제적으로 가장 풍족한 시기였다고. 하지만 돈을 잘 벌었다는 이 시기에도 함께 다니던 매니저가 행사비를 중간에서 가로채는 사건도 있었다. 지긋지긋할 정도로 사기와 배신이 난무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2005년 가세가 기울었다. “이 때부터가 진짜 고난의 시작이었다”는 노아는 이때부터 온갖 막노동을 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같은 해 스타제국엔터테인먼트와 계약하고 2년 후인 2007년 3집 앨범 ‘더 소울 싱어’(The Soul Singer)를 발매했다.
사실상 이 앨범의 타이틀곡 ‘나란 사람’은 기존에 유지했던 노아만이 낼 수 있는 색깔을 빼고 ‘소울’을 표방한 곡이었다. 무슨 연유에서인지 모르지만 당시에는 노아가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당연히 기존의 노아를 기대하던 팬들에게는 큰 실망을 안긴 앨범이다.
“앨범을 내고 같은 해 군대를 갔고, 디스크 때문에 1주일 만에 퇴영했죠. 그리고 얼마 후 결혼까지 했어요. 원래는 2012년까지 스타제국과 계약이 되어있었는데 여러 가지 문제 때문에 일찍 계약을 해지했죠. 20대의 마지막은 그동안 당했던 모든 일을 정리하고 빈털터리가 된 채 끝났어요.”
◇30대 “이제 다시 시작이다”
“사실 가장 많이 투자가 이루어져야하는 부분은 콘텐츠 자체잖아요. 그것들이 애먼 곳으로 가더라고요. 물론 필요는 하지만, 뭐든 과한 게 문제죠. 이런 걸 싫다고 백날 얘기해봐야 내 앨범을 내려면 또 그런 곳에 들어가야 하는 거잖아요. 결국 다람쥐 쳇바퀴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건데, 그걸 하기 싫어서 만든 것이 피넘이에요.”
30대에 접어든 김준파(이름을 바꾸고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했으니 노아가 아닌, 김준파로 부르겠다)는 미니베스트 앨범을 내더니 돌연 사업을 시작했다가 또 한 번 투자 유치에 실패하고 인생의 쓴 맛을 봤다. 이후 심기일전해서 엔터테인먼트를 사업을 시작한 것이다.
2011년 피넘의 한국대표 김준파는 미국대표 스코티 김(Scotty Kim)과 만나 함께 일하자는 제안을 받았다. 이후 지난해 미국 최고 프로듀서인 타미 브라운과 아시아 퍼블리싱 독점 계약을 체결, 미국과 아시아 여러 국가들과 활발한 퍼블리싱 작업을 진행한다.
타미 브라운은 블랙아이드피스 ‘저스트 캔 겟 이너프’(Just Can't Get Enough), 레이디가가 의 ‘텔레폰’(Telephone) 등을 비롯해 저스틴 비버, 나스, 메리 제이 블라이즈, 자넷 잭슨, 저스틴 팀버레이크, 리한나 등 최고의 아티스트들의 곡을 작곡 및 프로듀스한 경력을 갖고 있다.
또 한국과 미국 현지 최고의 아티스트들을 발굴하기 위해 끊임없이 오디션을 진행 중이며 한국과 미국시장을 넘나들며 아시아 아티스트들과 미국 현지 아티스트들과의 연결을 위해 미국시장 진출을 진행하고 있다. 특히 리한나, 제니퍼 로페즈, 알리샤 키스, 블랙아이드피스 등과 국내 콜라보 공연 등을 추진하고 있으며, 미국 내 최고 레이블사인 인터스쿱의 아티스트들과도 콜라보를 기획 진행 중이다.
“지금하고 있는 퍼블리싱과 콜라보 작업은 사실 우리 소속사 아티스트들에게만 적용시키려고 했어요. 이런 고급라인을 누구한테 공개하겠어요. 그런데 또 투자를 결정해놓고 돌연 취소하는 사람들 때문에 마냥 기다릴 수는 없는 거예요. 회사가 돌아가야 하니까 시작하게 된 거고, 소속사 아이들을 키우기 위한 자본을 마련하기 위한 수단이자, 한국 가요계의 질 향상을 위한 것이죠. 일석이조 아니겠어요?(웃음)”
가수 생활을 해봤던 그는 소속 연습생들의 입장을 십분 이해했다. 그래서 퍼블리싱, 콜라보를 통해 자본을 마련해 연습생에게 다른 비전을 제시해주고 싶다는 것이었다. 이 사업을 통해 아이들을 키울 수 있는 밑그림을 그려놓고, 현재 소속되어 있는 메이저 팀과 인디 팀을 각자의 스타일에 맞게 서포터해줄 생각이다.
“이 친구들도 수익이 아니잖아요. 자선사업가가 아니니까. 근데 대한민국의 음악시장이 인디 친구들까지 수익사업에 뛰어들 수 없는 시스템으로 되어 있잖아요. 그래서 제가 데려왔죠. 예술성을 가지고 있는 친구들의 마인드를 지켜주고 싶어요.”
소속사 연습생들뿐만 아니라, 김준파 자신도 가수 생활에 다시 뛰어든다. 물론 당장은 아니지만 음악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그는 회사를 어느 정도 궤도에 올려놓은 후 전문 CEO를 인사해서 경영을 맡기고 프로듀서와 음악에만 매진할 계획이다.
박정선 기자 composer_js@mkcultur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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