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남자의 모습은 오간 데 없고 정 많고 착한 남자 김남길과 앞을 보지 못하는 아픔은 있지만 밝고 유쾌하게 다가오는 여자 천우희의 조화는 생각지 않게 눈물을 떨구게 한다. 미소와 잔잔한 감독은 기본이다. 삶과 죽음, 상처와 치유에 관한 두 남녀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어느날'이다.
아내가 죽고 희망을 잃은 채 살아가던 보험회사 직원 강수(김남길). 상실감과 죄책감이 큰 그는 회사로 돌아온 뒤 교통사고로 뇌사상태인 여자 미소(천우희) 사건을 맡게 된다.
병원에서 나오다 자신을 미소라고 소개하는 여자를 시답잖게 생각하다가 거울에 아무것도 비치지 않자 혼비백산한다. 하고 싶은 것 많은 미소는 강수에게 여러 가지를 부탁하고, 강수는 못 이기는 척 들어준다.
가장 힘들 때 만난 두 사람은 서로를 보듬으며 친구이자 동반자로 시간을 함께 보낸다. 하지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윤기 감독은 전작들에서 보여준 로맨스나 멜로 감정을 철저히 배제했다. 이 감독의 영화가 새롭게 느껴지는 지점이다. 어느 순간 울컥 눈물이 나는데 그게 엄청난 감정의 폭풍은 아니지만 몇몇 신에서 잔잔하게 다가오는 부분이 꽤 많다.
두 사람의 숨겨진 이야기들이 후반부에 드러날 때까지 관객은 눈물 흘리고 미소 짓다가 먹먹한 느낌에 한동안 스크린을 바라보게 될 것 같다. 그 비밀들은 극단적인 충격을 줄 수 있을 텐데 영화는 그런 방법과 시선을 피한다. 최소한의 수위 조절로 적당한 감정선을 유지하려고 노력한 티가 역력하다.
감독의 디렉션도 좋았겠지만 배우들의 연기 덕이 큰 것 같다. 바보 같아 보이기까지 하는 강수는 착하고 정많은 캐릭터를 잘 연기했다. 천우희는 이제껏 연기한 것과 달리 쾌활하고 유쾌한 모습을 보인다. 첫 등장부터 상큼하다. 후반부로 갈수록 아픔이 드러나는 표정이 마음을 적신다.
미용실 주인 정선경과 '나이롱 환자' 윤제문은 나름대로 영화에 또다른
슬픈 이야기인데 영상과 음악은 아름답게 사용됐다. 아픔이 있지만 남겨진 사람은 살아야 한다는 그 아이러니함이 영화 전반에 녹아있는 것과 어울린다. 사랑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지만 오히려 당연히 로맨스 멜로일 것이라는 그 선입견을 깨 반갑다. 114분. 15세 이상 관람가. 5일 개봉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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