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N스타 김성현 기자] 영화 ‘명량’에서 벙어리 아내를 맡아 죽어가는 남편을 보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이정현이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에서는 사랑하는 남편을 위해 궂은일도 마다 않는 억척스런 아내로 돌아왔다.
영화 속 이정현의 이미지는 늘 평범하지 않았다. 지난 1996년 그가 원톱으로 출연한 ‘꽃잎’에서는 엄청난 광기가 서린 소녀 역을 맡았었고, 이번 영화에서는 맹목적으로 사랑하는 남편을 위해 살인까지 마다 않는 여자다. 캐릭터를 고르는 그의 모습에는 엄청난 열정이 엿보였다.
“저는 시나리오를 읽을 때 영화의 임팩트가 있느냐. 또 관객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역할을 중요하게 생각해요. 그래서 늘 약간 센 느낌이 있는 캐릭터를 맡은 것 같아요. 관객들에게 각인이 되고 싶거든요.”
↑ 사진=정일구 기자 |
박찬욱 감독을 통해 시나리오를 읽게 된 이정현은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에 반해버렸다. 시나리오를 마친 안국진 감독은 처음부터 이정현을 수남 역으로 점찍었지만, 그의 회사에서는 엄청난 잔인성 때문에 거절했었다. 이후 박찬욱 감독의 전화 한 통으로 출연을 결심한 그는 오랜만에 만난 완벽한 시나리오를 극찬했다.
“사실 ‘명랑’이 끝나고 많은 상업영화 시나리오들이 들어왔었어요. 하지만 굳이 제가 맡지 않아도 영화가 흘러가는 것들이었어요. 하지만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는 여성을 원톱으로 내세운 영화였고 신인 감독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은 정도로 시나리오가 완벽했어요”
이정현이 맡은 수남은 누구보다 바지런하고 성실하게 살았지만 쌓이는 빚더미에 궁지에 몰린, 손재주 좋은 주부다. 그에게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는 바로 사랑하는 남편이다.
↑ 사진=정일구 기자 |
“영화에서는 30대 여인이 자신의 행복을 가로 막는 사람들을 처참하게 응징해요. 하지만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그 응징이 정말 뜬금없이 벌어지는 것으로 느껴질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관객들을 잘 이해시키려면 남편을 향한 수남의 맹목적인 사랑이 정말 맑고 순수해 보이는 다소 유아틱한 캐릭터여야 한다고 느꼈죠.”
이정현은 유아틱한 캐릭터를 완성시킨 일등공신을 바로 자신의 5살짜리 조카로 꼽았다.
“유아틱한 설정을 위해 생각한 것이 글씨였어요. 극 중 수남이 메모를 하거나 남편에게 편지를 쓸 때 글씨체를 모두 꺾어서 써요. 제 조카가 그렇게 글씨를 쓰더라고요. 아마 어린아이들이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에서 글씨를 배울 때 정자체를 배워서 그런가 봐요. 또 경숙이랑 대면하는 자리에서 밥을 먹는 장면이 있는데, 그 때 수남은 이미 겪을 일을 모두 겪고 정상이 아닌 상태에서 또 다른 잔혹한 살인을 해요. 그 장면에서도 순수함을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밥을 먹을 때 숟가락을 잡는 법, 밥을 먹는 모습도 어린아이처럼 연기하려고 했어요.”
극 중 고아로 자라 하늘아래 의지할 곳은 남편 하나뿐인 수남은 남편을 행복하게 할 ‘내집마련’을 위해 신문배달, 명함던지기, 식당 보조, 파출부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한다. 여리여리한 몸으로 이런 고된 일을 한다는 것이 보기 안쓰러울 정도다.
“영화 속에서 수남이 청소의 달인처럼 엄청난 실력을 청소를 해요. 그 장면을 위해 집에서도 정말 많이 연습했어요. 저 정말 청소 잘하거든요(웃음). 그리고 명함 던지는 장면은 정말 피나는 연습을 했어요. ‘생활의 달인’ 프로그램을 보니까 정말 던지는 족족 다 들어가더라고요.”
이정현의 열정과 노력은 수남의 스타일링에서도 빛났다. 고된 노동으로 침침한 눈가와 부스스한 머리, 어딘가 어두워 보이는 수남의 옷차림새는 이정현의 강한 피력으로 바뀌었다.
↑ 사진=정일구 기자 |
“처음 감독님이 생각하는 수남은 꽃무늬에 집착하는 여자였어요.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부 꽃무늬였죠. 마치 홍대 미대생 같은 느낌이랄까? 하지만 제가 생각한 수남의 이미지와는 많이 달랐어요. 하지만 제가 감독님의 의견에 왈가왈부하기도 그렇고 해서 그냥 있었는데, 첫 촬영 현장에서 도저히 촬영을 못하겠더라고요. 그래서 감독님께 색 톤도 낮추고 좀 더 초췌해 보일 수 있도록 얼굴에 음영을 주자고 말씀드렸죠.. 언짢아하실 줄 알았는데, 어쩜 자기 생각하고 똑같다고 좋아하셔서 정말 다행이었어요.”
이정현의 열정과 노력이 녹아있는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는 제작비 3억이 든 저예산 영화다. ‘협녀, 칼의 기억’이나 ‘미쓰 와이프’ ‘뷰티 인사이드’ 같이 쟁쟁한 작품들과 경쟁을 하게 된 그에게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만의 강점을 물었다.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는 워낙 작은 작품이라 경쟁한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것 같아요. 하지만 이 영화에는 과감한 잔인성과 통쾌한 복수 등 복합적인 것들이 다양하게 들어간 영화예요. 많은 분들이 꾸준히 와서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김성현 기자 coz306@mkculture.com /페이스북 https://www.facebook.com/mbnstar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