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유명 솔로 가수의 매니저 A씨. 적은 연봉에도 11년을 버텨온 그는 이사 직함을 달고 있다. 큰 회사는 아니지만 그간의 공을 인정받아 곧 독립 레이블 운영을 맡기로 했었다. 그런데 그 꿈은 물거품이 됐다.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나라에서 갑자기 자격 기준을 만들었는데, 그는 이에 부합하지 않았다.
#2 이름만 대면 알만한 아이돌 그룹 제작자 B씨. 그는 매니지먼트 경력 20년차이자 한 회사의 대표다. 하지만 서류상 회사 대표는 아니다. 한때 사업 실패 탓 신용불량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의 연예계 영향력은 여전히 무시할 수 없다. 업계 종사자 누구나 다 그를 '대표'로 인정하고 그렇게 부른다.
가요계에서 잔뼈가 굵은 A씨와 B씨는 내달 말께부터 지금 하던 일을 대외적으로 계속 할 수 없다. 암암리에 움직일 수밖에 없다. 잘못 하면 불법 연예기획사 요주의 인물로 낙인 찍힌다. 시시비비를 따지면 2년 이하 징역 또는 1000만원 이하 벌금을 내야할 수도 있다.
대중문화예술산업발전법(2014. 7.22 국무회의 의결)이 오는 7월 29일부터 시행된다. 개업일이 해당 법 시행일 이전인 연예기획사, 매니지먼트사, 캐스팅 디렉터, 공연 알선인, 모델 에이전시 등은 대중문화예술기획업 등록을 각 지자체에 해야 한다.
7월 28일까지 등록 접수한다고 되는 간단한 일이 아니다. 해당 업체 종사자들은 한국콘텐츠진흥원 대중문화예술지원센터에서 경력증명서를 발급받아야 한다. 이후 사무소 요건을 증명하기 위한 임대차 계약서 등을 첨부해 관할 자치단체에 제출해야 한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은 처리 기간을 고려해 오는 6월 19일까지 접수를 서둘 것을 권하고 있다. 한 달이나 남았다고 여유를 부리다가는 졸지에 불법 업체로 간주된다.
문제는 기준이다. 매니지먼트사를 운영하거나 임원으로 이름을 올리려면 4년 경력 이상이 인정되어야 한다. 기준은 4대 보험(국민연금·건강·산재·고용보험) 가입 여부다. 또한 4년 경력을 채웠더라도 '아청법(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 위반자나 파산한 자는 불가하다.
연예기획사의 위법·부당 행위 폐단을 근절하겠다는 취지는 좋다. 그러나 관련 법 시행을 앞두고 현장 실태를 제대로 파악하지 않은 행정 편의주의적 기준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일단 연예계 종사자들의 열악한 근로 환경 자체가 고려되지 않았다는 지적이다. 대형기획사 및 기득권층 중심의 의견 수렴 결과라는 불만이 나온다.
A씨는 "대형 기획사 혹은 굵직하게 자리매김한 회사가 아니라면 가수 매니저는 비정규직이 대다수"라고 말했다. 규칙대로라면 이들은 아무리 오랫동안 연예계에서 일을 해왔어도 신규 사업자 등록이 불가하다.
"이 바닥(엔터테인먼트업계)이 4대 보험 가입을 요구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다. 10년을 넘게 일했어도 이제 와 4년 경력을 인정받지 못하니 자괴감과 상대적 박탈감이 심하다"는 게 그의 억울함이다.
실제로 국내 연예 제작 시스템은 전반적으로 도제식 문화가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다. 제자가 스승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하며 지식과 기능을 배우는 방식이다. 선배 매니저 혹은 제작자의 수족이 돼야 했다. 그러면서 쌓인 제작 노하우와 인맥이 곧 재산이다. 이른바 '열정 페이'의 원조 시장 중 한 곳이 연예계다.
매니지먼트 영역 제한도 애매하다. B씨는 "매니지먼트와 A&R팀으로 앨범 크레디트에 이름을 올린 것 따위는 증빙이 되지 않는다더라"고 한숨을 내쉬었다.
매니지먼트가 기본인 배우 기획사와 달리, 가요계는 사업자 등록 종목에 음반 제작·기획이나 공연 등만을 올려놓은 경우가 많았다. B씨는 "가요계에서 매니지먼트는 음반을 만들고 활동하는데 필요한 부수적 개념이자 포괄적인 의미로 해석하는 측면이 강했다"고 설명했다.
한국콘텐츠진흥원 측은 "기존 업자들에게는 경력을 따지지 않고, 작년 7월(입법 시점) 당시 소득 증명이 있으면 된다"고 강조했다. '4년 경력'은 국회에서 공청회를 거쳐 나온 기준이다. 없던 기준이 생긴데 대한 어느 정도 업계 불만은 불가피하다는 입장이다.
다만 이 역시 누군가에는 황당하다. 영세 기획사는 소속 아티스트의 활동이 없는 기간 아예 지출·수입이 없을 때도 있다. 이러한 법적 기준을 미리 인지해 억지로라도 7월 자료를 만들지 않았다면 그해 앞선 5·6월 소득 증빙은 의미가 없다.
1인 기획사 형태로 직접 활동해온 뮤지션들도 난감하다. 본인 활동은 상관 없지만 앞으로 후배 양성이나 다른 가수와 전속계약을 하려면 그들 역시 매니지먼트사에 속해 4년 경력을 쌓아야 한다. 아니면 자격이 되는 대표이사를 굳이 영입해 자리에 앉혀야 한다. 일련의 과정 없이 자신의 이름으로는 매니지먼트사를 못 차린다는 이야기다.
상식적 공감을 얻지 못하고 있다. 4년 경력이 도덕성을 평가하는 잣대가 될 수 있는지조차 의견이 분분하다. "XX, 경력만 뽑으면 신입은 도대체 어디서 경력을 어디서 쌓으라는 거냐'는 한 방송작가의 꽁트 속 촌철살인도 떠오르는 대목이다. 꼼수'가 생기지 않을 수 없다. 결국 대중문화예술산업발전법 실효성에 의문 부호가 붙고 있다.
한 가요 매니저는 "솔직히 성추행·사기 같은 폐단을 저지른 기존 사업자들이 전면에 나서지 않는다고 이 바닥을 떠났다고 보는가. 연예계 내부의 자정 노력과 구조적 폐단에 대한 해결 없이 신규 사업자에게 엄한 기준을 적용하는 건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눈 흘기는 꼴"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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