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스팅 논란으로 늦게 시나리오를 받았지만 이상하게 부담이 없었어요. 여러 인격을 연기해야 했음에도 그랬어요. 대본만 보고도 ‘내가 잘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었는데, 큰 욕심이 없었기에 그랬을지도 모르겠네요.”
배우 지성(38)은 지난 12일 종영한 MBC 드라마 ‘킬미힐미’에 대한 소회를 이렇게 전했다. 17일 서울 신사동의 한 포차에서 진행된 종영 기념 간담회에서다. 이 드라마의 시놉시스는 여러 배우들을 전전하다 촬영 돌입 직전 지성에게로 향했다. 그는 이를 두고 “뜬금없지만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고 했다.
지성은 극 중 7개 인격을 가진 차도현으로 분했다. 이 인물 속에는 신세기, 페리박, 요나, 요섭, 나나, 미스터X 등의 인격들이 내재돼 있다. 인격을 하나 씩 죽임(킬미)으로써 자신을 찾아가는(힐미) 내용이 그려졌다.
“여러 인격들은 ‘차도현’이라는 한 사람 안에서 생긴 것이기 때문에 연결요소를 무시할 수는 없을 거예요. 모든 인격들이 어린 시절 학대 현장의 기억을 지닌 인생을 통해 발현된 것이니까요. 결국 한 사람의 인격을 이야기 하는 거죠. 그래서 활달한 ‘요나’로 변신해도 저는 웃기지 않았어요. 드라마의 주제가 분명하거든요. 현대인들이 어렵고 힘든 일이 많은데 그 분들에게 주고 싶은 선물이기도 해요. ‘치료가 됐으면 좋겠다’라는 것이요.”
자연스러우면서 익살스러운 그의 연기에 시청자들은 찬사를 보냈다. 드라마 또한 ‘힐링 드라마’라는 애칭을 얻었다. 하지만 지성에게는 드라마가 끝난 후 몰입에서 벗어나는 숙제가 남아 있다. 그는 일상으로의 복귀, 한 여자의 남편이자 한 아이의 아빠가 될 준비를 하고 있다.
“문득 겁이 났어요. 드라마가 끝나고 일상으로 잘 돌아갈 수 있을까? ‘킬미힐미’ 때문에 힘들까봐서요. 예를 들면, 제가 고등학교를 여수에서 나왔는데 그 때 전라도 사투리를 써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어요. 그런데도 몰입이 되니까 어렸을 때 듣고 봤던 기억들이 자연스레 페리박으로 표현이 된 것 같아요. 저도 신기하더라고요. 이런 게 연기가 아닌가 싶어요. 그러고 다시 현실에 눈을 떴을 때, 앞으로의 제 인생에 대한 계획이 세워졌어요. 아내와 아이가 있는 현실들에 몰입해보자고 말이죠.”
“마흔 다 된 배우를 두고 시청자들이 공감을 안 해주면 어쩔 수 없는 것이라 생각했어요. 버릴 건 버리자고 말이죠. 오히려 편해지더라고요. 결과에 기대지 않고 마음을 비우니 많은 사랑을 받은 것 같아요. 제가 언제 요나처럼 여자 교복을 입고, 신세기처럼 아이라인을 그리거나, 페리박처럼 구수한 여수사투리를 써가면서 연기를 해볼 수 있을까요? 하나하나 캐릭터들이 다 소중하죠. 정성들여 만든 것들이기 때문에 오래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아요.
20부작 중 18회분 촬영에 돌입했을 때, 지성은 성대결절로 목소리를 잃었다. 하루 만에 회복했지만 촬영분을 내보내기까지 여유는 24시간뿐. 지성은 불가능을 가능케 한 스태프들과 다른 배우들에게 고마워하면서도 미안한 감정을 드러냈다.
“17회 촬영 때 괴성을 지르는 장면이 있는데 거기에서 목소리를 다 써버린 거예요. 급히 병원에 가 주사도 맞고 약을 먹었는데도 회복까지 하루가 걸리더군요. 그때가 화요일이었으니 수요일에 목요일 방영치를 한 번에 찍었어야 했어요. 얼마나 급박했는지 아시겠어요? 그런데 되더라고요. 우리 ‘팀’이 해낸 거죠. 그런데 모든 주목은 제가 다 받아서 죄송해요. 동료배우들도 마찬가지고요. 배우들은 편집된 부분도 상당히 많거든요 저 때문에. 동료들과 스태프의 도움이 없이 ‘킬미힐미’는 없었을 거예요.”
어쨌든 드라마 주인공의 공로는 큰 법. 그의 열연에 벌써부터 ‘대상 배우’라는 수식어가 따라붙고 있다. 특히 그의 아내 이보영은 대상을 받아본 경험이 있다. 배우 지성에게 대상이란 어떤 의미를 가질까.
“자꾸 대상이 언급되는데 생각도 없고 반기지도 않아요. 단지 제가 배우로서 존재해가고 있구나, 느끼게 된 것에 만족해요. ‘킬미힐미’처럼 진심을 담을 수 있는 작품들을 계속 해갈 수 있다면 좋겠어요. 상은 중요하지 않아요. 저를 훌륭하게 평가하는 여러 기사들이 제겐 상이예요. 남에게 찬사를 보내는 기사를 많이 봤었고, 저도 그런 찬사를 받고 싶은 배우가 되고 싶었거든요. 저에 대한 아름다운 기사를 볼 때마다 진심으로 감사했고, 잊지 않겠다고 다짐했어요. 계속해서 발전하겠다고요.”
“오히려 그런 의식들이 더 좋게 작용했어요. 우리는 우리고 그 쪽은 그 쪽이니까요. 좋은 드라마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을 뿐이죠. 어떤 드라마는 잘 되고, 어떤 작품은 잘 안되는 게 어쩌면 당연한 일인 것 같아요. 저도 어떤 드라마에서는 관심을 못 받은 적도 있고요. 표절 의혹에 대해서는 제가 말할 수 있는 게 없는 것 같아요. 저는 주어진 상황에서 진심을 담아 연기했고 끝까지 노력했을 뿐이에요.”
지성의 연기력을 극한까지 끌어올린 건 김진만 감독과 진수완 작가다. 그가 마음껏 뛰어다닐 수 있게, 배우가 하고자 하는 것을 묵묵히 지켜봐줬다. 특히 상대 배우 황정음과는 두 번 연속 호흡을 맞췄다. 지난 2013년 KBS 드라마 ‘비밀’에 이어서다. 황정음은 앞서 “결혼 후 지성과 다른 작품에서 또 만나고 싶다”고 밝히기도 했다.
“황정음과의 인연은 각별하죠. ‘케미’라는 걸 무시할 수 없어요. 연기할 때 상대의 반응이 좋지 않으면 정말 무의미하거든요. 어떤 인격과 호흡을 맞춰도 정음 씨의 ‘리액션’은 굉장했어요. 정음 씨가 있었기에 여러 인격들이 함께 놀 수 있었어요. 훌륭한 배우라고 생각해요. 다시 할 기회가 있다면 언제든지 하고 싶어요. 아마 결혼하고 다시 만날 것 같긴 하네요. 또 이 드라마를 할 수 있게 해주신 감독님과 작가님에게도 감사해요. 제 애드립을 모두 허용해주셨거든요. 특히 이번 드라마는 처음부터 끝까지 구성이 완벽했던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작가님의 아이디어에 큰 박수를 쳐주고 싶어요. 물론 숱한 감정 씬을 소화한 저를 작가님도 알아주셨으면 해요. 하하.”
지성은 이에 대해 “향후 또 좋은 일이 추진된다면 언제든 참여할 준비가 돼 있다. 우리 드라마를 통해 단 몇 사람이라도 가슴이 따뜻해질 수 있다면 좋겠다”고 말했다.
“감독님이과 둘이 ‘각자 인생에 있어 잊지 못할 작품’이라고 이야기했다”는 지성. 그는 마지막으로 중국에서 불고 있는 ‘킬미힐미 열풍’에 대해 입을 열었다. 지성은 마지막까지 겸손했다.
“중국에서 인기요? 별로 실감은 안 되지만 제가 중화권으로 가야하는 기회가 온다면 대한민국 배우로서의 책임감은 잊지 않겠습니다. 중국에서 인기가 많다는 건 대단한 일이잖아요. 한국에서 만든 하나의 드라마일 뿐일지라도 그 인기만 누리진 않겠습니다. 우리나라 문화를 알리고 싶어요. 사실 우리나라 배우들이 그 어느 나라 배우보다 잘 생겼잖아요. 연기도 잘하고요. 자부심을 느껴요. ‘킬미힐미’가 중국대륙을 흔드는 그 날이 언젠가 올 수도 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