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박범수(35) 감독이 대학을 졸업하고 그토록 연출하고 싶은 작품을 연출할 수 있을 때까지 걸린 시간이다. 박 감독은 10년 동안 270여 편의 성인 영화를 찍은 연출가. 그 이력이 상업영화를 찍는데 전혀 도움이 안 된다며 퇴짜를 맞았고, 편견에 맞서 싸워야 했다. 하지만 결국 그는 성공했다.
에로 영화를 만들던 감독과 배우, 제작진이 멜로드라마를 만들기 위해 애쓰는 내용을 담은 영화 ‘레드카펫’이 23일 개봉한다. 이 영화에 박 감독의 이야기가 오롯이 담겨 있다. 이제야 웃으면서 얘기할 수 있지만, 무시당하기 일쑤였던 그다. 감독 취급이나 받았을까.
박 감독은 이 영화를 연출하는 과정이 녹록지 않았다고 털어놨다. 캐스팅부터 문제였다. 퇴짜의 연속. 사실 퇴짜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몇몇 배우들에게 시나리오를 건넸지만, 답조차 오지 않았다. “3달을 기다렸는데 아무 소식이 없더라고요. 검토하긴 했는지도 모르겠어요. 얘기를 나누면 그래도 이해해주는 편인데 그런 기회조차 없었으니 아쉬웠죠.”
2009년 시나리오 학원에서 수업을 들었던 게 어쩌면 ‘레드카펫’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강사로 있던 박헌수 감독 겸 작가의 말이 꿈을 꾸게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범수 감독은 심드렁하게 자기소개를 한 다른 수강생들과 달리 적극적으로 자신을 알렸다.
“전 에로영화를 찍어왔는데, 부모님과 함께 볼 수 있는 영화를 찍고 싶습니다”라고 소개했고, 사람들의 관심을 받았다. 이후 박헌수 감독은 “네가 한 이야기가 30명한테 감동을 준 것 같다. 그러면 30만 명한테도 감동 줄 수 있는 거야”라며 후배를 다독였다. 실제 그런 생각으로 진심을 다했고, 어려움은 있었지만 ‘레드카펫’은 탄생했다.
지난 2012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기회를 얻은 것도 행운이었다. 자신들의 영화를 알리는 피칭 행사에서 사람들로부터 관심을 받았고, 이후 영화는 착착 진행됐다. 윤계상이 캐스팅됐고, 고준희가 자신의 프레젠테이션 영상을 어떻게 봤는지 그걸 보고 찾아왔더란다. 진환 PD 역에 최적이라고 할 수 있는 오정세도 함께하기로 했고, 아이돌 2PM의 찬성도 합류했다. ‘19금 영화계 어벤져스’ 팀은 그렇게 꾸려졌다.
캐스팅된 모두가 만족스럽지만 굳이 꼽는다면 윤계상과 함께했다는 점이 가장 좋다. 자신의 역할을 맡을 배우가 잘생겨서? 자신과 닮았다고 생각해서? 박 감독은 “그건 아니다”며 손사래 쳤다.
박 감독은 윤계상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봤다고 했다. 직접적인 것이 아니라 간접적 표현이다. 자신과 윤계상에게 사람들은 일종의 선입견이 있다는 것. 아이돌 출신이 연기하는 것과 에로영화 감독 출신이 다른 영화를 만들겠다는 시도를 바라보는 시선 말이다.
“계상씨가 영화에 와서 아이돌 이미지를 벗으려고 부러 힘들고 강한 캐릭터만 하는 것 같은 추측을 했거든요. 사실 계상씨는 예전 작품을 찾아보면 재미있었던 게 많았잖아요? 그 안에서 꺼낼 수 있는 게 많다고 생각했죠. 많은 이야기를 나눴는데 허당기가 있는 모습을 꺼내 보이면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었어요. 솔직히 계상씨가 캐스팅돼 좋았죠.”
동아방송대 방송연예과 1기 출신인 그는 조교를 하다가 학과장의 추천을 받고 한 회사에 들어갔다. 과장이라는 직함을 달게 해주겠다는 꼬임(?)에 입사했다. 과장이긴 했지만 막내 역할도 함께해야 했다. 게임도 만들고, 성인 콘텐츠도 만드는 업체였다. 그렇게 성인 콘텐츠 작가로 활동하다가 자연스럽게 성인영화 연출가가 됐다. 10년의 세월은 후딱 지나갔다.
“처음 2~3년 성인영화를 할 때는 예민했고 사람들의 안 좋은 시선도 싫었는데 5년 차 넘어가서는 너무 당연하게 생각했어요. ‘왜 잘 알지도 못하면서 우리를 비하하는 거야?’라는 생각을 했죠. 하지만 성 소수자를 향한 오해 등 상대를 몰라서 오해하는 것들이 있잖아요. 그것과 마찬가지로 괜한 상처를 받을 필요 없다고 생각했죠.”
박 감독은 벌써 다음 작품에 대한 생각도 있다. 이미 구상도 대충 끝났다. ‘레드카펫’의 흥행 여부에 달렸지만, 연출력도 괜찮으니 다음 영화를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코미디를 하고 싶다고 했다. 물론 내용은 아직 다 밝힐 순 없다.
이 영화로 그를 바라보는 편견이 깨질까? “아닐 것 같아요. 그래도 한 걸음씩 나아가는 게 좋은 게 아닐까요? ‘성인영화 하던 친구들도 이렇게 만들 수 있어!’라는 생각을 열어줄 수도 있잖아요. 그렇게 조금이라도 보탬이 된다면 영광이 아닐까 해요.(웃음)”
jeigun@mk.co.kr/사진 유용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