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단한 하루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TV를 켠다. 오늘의 10시 드라마가 달콤한 휴식이 되리라 굳게 믿으며 리모콘을 눌러 또각, 채널을 맞춘다. 그러나 이 무슨 당치도 않은 시추에이션이란 말인가. 마음 졸이게 만드는 이놈의 드라마 덕분에 오히려 벌을 받는 기분이다.
여기 위기의 두 남자가 있다. 배우 권상우와 조인성. 이들은 소파에 드러누워 뒹굴거리는 우리를 이따금 벌떡 일어나 긴장하게 하는 남자들이다.
SBS 새 드라마 ‘야왕’과 ‘그 겨울, 바람이 분다’의 주인공으로 열연 중인 이들은 앞으로도 쉽사리 편안한 밤을 허락해 줄 것 같지 않다. 이유는 다르지만 이 두 사람은 극중에서 사기를 쳐야만 하는 사명(?)을 지닌 위태로운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세상 어디에도 없는 착한 남자’가 또 다시 등장했다. 한 여자를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친 남자, 극중 권상우가 맡은 하류다.
사랑하는 여자 주다해(수애)를 위해 몸을 팔면서 돈을 벌었고, 혼자 아이를 기르며 숱한 시간 그녀를 기다렸다. 인생 한 구석 자신을 위해 남는 장사 한 번 못했지만, 그래도 다해와 함께 있어 행복했다. 그러나 지금 다해는 그의 곁을 떠나고 없다. 돈 많은 재벌 3세 백도훈(정윤호)과의 새 삶을 시작하기 위해 하류와 자신의 딸을 무참히 버린 것.
이후 그녀는 딸 은별과 하류의 형 재웅까지 죽음으로 내몰았고, 의붓 아버지를 찔러죽인 걸 하류에게 뒤집어씌우기까지 하는 악랄함을 드러냈다.
이쯤 되면 하류도 ‘착한 남자 놀이’는 그만둬야 한다는 걸 깨달았을 터. 자신의 쌍둥이 형 재웅의 죽음을 복수의 기회로 다해를 무너뜨릴 계획을 준비한다.
하지만 이것도 녹록치 않다. 배움이 짧은 하류가 변호사 형의 인생을 대신 산다는 것 자체가 ‘미션 임파서블’이다. 상대는 치밀한 악녀 다해다. 이에 우리는 마음을 졸일 수밖에 없다. “안녕하세요. 차재웅입니다”며 야심차게 복수의 포문을 열었지만, 이미 다해는 그의 정체에 대한 의심을 품고 지문을 찍으려고 하는 등 시작부터 그를 위태롭게 하고 있다.
또한 복수의 일환으로 다해의 상사 백도경(김성령)을 유혹할 것을 계획했지만 역시 너무 어설펐다. 도경이 좋아하는 와인과 영화 등 잡다한 것들을 외웠지만 공부가 충분치 않았다. 실전에서 들킬 뻔했다.
시청자들은 이 멋지고 억울한 남자가 ‘잘 되기’를 바란다. 악녀 다해에게 통쾌한 복수를 선사하기를 열망한다. 하지만 하류는 번번이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 순박한 남자가 사기를 쳐야만 하는 운명을 타고났다는 것이 아이러니일 뿐이다.
하지만 24부작 ‘야왕’은 아직 여정의 반도 오지 않았다. 몇 주 후면 통쾌한 복수극으로 개운한 밤을 맞게 될 지도 모른다.
누군가와 관계를 시작하기에 앞서 가끔 두려워질 때가 있다. 드라마 ‘그 겨울, 바람이 분다’의 극중 조인성이 맡은 오수의 인생을 보며 또 한 번 ‘만남’의 중요성(?)을 깨닫고야 만다.
전문 포커 겜블러인 오수는 부모에게 버림 받고 첫사랑에 실패하면서 삶에 큰 의미를 두지 않은 채 하루하루 방탕하게 사는 인물이다. 그런 그가 사랑에 진지할 리 만무. 진소라(서효림)라는 여자는 그에게 열과 성을 다하며 사랑을 맹세한다. 하지만 소라는 늘 불안하다. 한시라도 그에 곁에서 떨어지게 되면 그가 다른 여자들과 놀아날 게 분명하다 생각한다. 그 대단한 집착으로 소라는 사랑하는 남자에게 78억원을 횡령한 누명을 씌워 감방에 보낸다.
인생을 막 살긴 했지만 이런 중범죄 근처엔 가본 적 없는 오수로선 그저 억울할 뿐이다. 너무 잘난 나머지 소라의 광기어린 사랑을 받은 게 잘못이라면 잘못이었을까. 출소한 후 오수는 생빚 78억원을 갚으라는 독촉에 시달리게 된다.
상황을 타계할 만한 방법 따윈 없다. 동종업계의 큰 손인 김사장의 여자 소라가 사랑하는 오수에게는 동지보단 적이 많다. 이 많은 돈을 갚지 못하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인 오수는 뜻밖에 ‘살고 싶다’는 삶에 대한 강한 의지를 깨닫는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던가. 그에게 상황을 타계할 기회가 날아들었다. 이미 죽은 동명이인인 친구 ‘오수’가 PL그룹 회장의 아들임이 밝혀진 것. 아직 그의 사망신고도 하지 않은 데다가 때마침 PL그룹 측에서 ‘오수’를 찾고 있기까지 한 완벽한 상황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에 오수는 친구의 삶을 대신 살기로 결심한다.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한 것이다. 하지만 그가 위장한 오수에게는 시각장애인 동생 ‘오영’이 있어 금세 정체가 탄로 날 위험이 아주 높다. 아니나 다를까 오영은 보이지 않는 만큼 예민한 감각들로 오수가 진짜가 아니라는 것을 깊게 의심하며 번번이 그를 위기로 몰아넣는다. 뿐만 아니라 오영 주변의 왕비서, 오영의 약혼자까지 유산 상속 시점에 등장한 그를 믿지 않고 있다.
오수의 물건들을 증거로 내세우고 있지만 오수는 오영과의 세밀한 역사를 알지 못한다. 겉은 속일 수 있지만 영혼까지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오수는 하루하루 거짓말과 과장된 연기로 연명해 나가고 있다.
의도치 않았지만 그는 사기극의 무대의 주인공이 됐다. 한 여자의 광기어린 집착으로 인생을 빼앗기고 또 한 여자의 인생에 못할 짓을 하게 됐다.
그는 과연 오영의 오빠로 인정받아 78억원을 갚을 수 있을까. 아니면 가짜 남매로 만난 두 사람의 관계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될까. 어느
사랑을 잃고 삶을 선택할 것인가, 삶을 포기하고 사랑을 선택할 것인가. 피곤한 밤이 물러갈 새도 없이 위태로운 수목 밤을 또 그렇게 맞이한다.
[매일경제 스타투데이 염은영 인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