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존스홉킨스대 산하 연구기관인 한미연구소(USKI)를 두고 잡음이 불거졌다. 청와대가 구재회 한미연구소 소장에게 퇴진 압력을 가하고, 정부 예산 지원 중단을 결정하는 과정에도 개입했다는 일부 언론의 보도에 청와대가 즉각 "한미연구소 개혁의 주체는 청와대가 아닌 국회"라고 정면 반박했지만 논란은 가라앉지 않고 있다.
한미연구소가 위치한 워싱턴D.C. 현지에선 이전부터 "한미연구소 운영에 문제가 많다"는 얘기가 파다해, 개혁의 필요성에 대해선 이견이 없는 분위기다. 다만 이 과정에서 미국 내 대표적인 북핵 대화파로 문재인정부와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로버트 갈루치 존스홉킨스대 한미연구소 이사장과 청와대 간 갈등이 빚어진 것을 두고 "문재인정부가 미국 내 우군을 잃게 됐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일부 언론은 지난 7일 한미연구소 상급기관인 경제인문사회연구회(경사연)가 보수성향인 구 소장의 퇴진을 추진하는 과정에 청와대가 개입했다고 보도했다. 한 언론은 경사연 산하 기관이자 한미연구소 상급 기관인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의 김준동 부원장이 지난해 10월 30일 워싱턴에 파견된 KIEP 주재관에게 보낸 이메일을 공개했다. 김 부원장이 메일에서 "BH(청와대)의 홍일표 행정관 측에서 현재 상황을 대단히 심각하게 보고 있다. 한미연구소 관련해 BH의 이태호 통상비서관과 홍일표 행정관에게 보고할 예정"이라고 적었다. 만약 이 이메일에서 김 부원장이 밝힌대로 청와대 관계자들이 KIEP측에 인선 압력을 행사한 것이 사실이라면 큰 파문이 예상된다.
다른 언론은 갈루치 이사장이 구재회 소장을 경질하라는 청와대의 요구를 거부하자, 주미 한국대사관 측에서 갈루치 이사장에게 "오는 6월부터 한미연구소에 대한 한국 정부의 예산 지원을 중단하겠다"는 방침을 통보했다고 보도했다.
청와대는 8일 이 같은 보도에 "한미연구소에 대한 예산이 잘못 쓰이고 있다는 국회 판단에 따라 (한미연구소에 대한 감독 권한을 갖고 있는) 경사연이 구 소장의 교체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라고 밝혔다.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이날 춘추관에서 기자들과 만나 "경사연에서 (한미연구소에 대한) 현장점검 등을 실시한 결과 구 소장에게 문제가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며 "연간 정부 예산 20억원이 들어가는데도 실적이 없었던 것에 대한 책임을 소장에게 물은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는 워싱턴에서 한미 관계 싱크탱크 역할을 하는 한미연구소에 국책연구기관인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을 통해 연간 20억원의 예산을 지원해왔다. 미국 대학 소속 연구기관이지만 한국 정부 예산을 받는 만큼 사실상 한국 정부의 감독을 받았다. 이 같은 감독체계를 살펴보면 예산 지급 주체인 대외경제정책연구소가 1차 감독을 맡고,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의 상급기관인 경사연이 2차 감독 권한을 갖는다. 경사연이 정부 국무조정실 산하 기구라는 점을 감안하면 '국무조정실→경사연→대외경제정책연구원→한미연구소'로 이어지는 관리·감독 체계가 형성돼 있는 셈이다.
워싱턴 현지에서도 한미연구소 구조조정이 필요하다는 얘긴 상당했던 것으로 전해졌다.미국 내 한국 관련 씽크탱크에 대한 구조조정 필요성은 지난 정부 때부터 제기됐던 사안으로, 정치적·이념적 성향과 무관하게 구조조정 작업이 진행됐을 가능성도 무시못한다.
그러나 한미연구소 측은 한국 정부가 구재회 소장을 경질하라는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지원금 중단을 결정했다면서 정치적 의도가 있다고 보고 있다. 구 소장이 전 정부 특정 인사와 가깝다는 소문에 대해서는 한국 정부로부터 지원을 받는 한미연구소 특성상 어떤 정권이 들어서더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할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해명했다.
이와관련 자유한국당은 논평에서 "'문재인 정권판 블랙리스트' 의혹이 일파만파"라며 "블랙리스트 논란은 한국 정부의 예산지원을 받는 미국 내 연구기관 인사개입으로까지 번지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어 "문재인 정권이 집권 1년이 채 되기도 전에 블랙리스트 의혹을 낳고 있으니, 그 대담성에 놀라울 따름"이라며 "'문재인 정권판 블랙리스트' 진실은 그리 오래지 않아 반드시 밝혀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아울러 이번 일로 갈루치 이사장과 한국 정부 사이의 관계가 불편해진 점을 두고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갈루치 이사장은 북핵 협상 경험을 바탕으로 미국 조야에서 대화를 통한 북핵 해결을 주장하며 문재인정부와 좋은 관계를 유지해 왔다. 갈루치 이사장은 한국 언론과 인터뷰에서 "구 소장에 대한 해임 압박은 학문의 자유에 대한 부적절한 개입"이라고 말했다. 이 때문에 주미 한국대사관측에서 한미연구소에 대한 개혁 방안을 갈루치 이사장 측에 전달하는 과정에서 의사소통에 오해가 빚어졌던 것 아니냐는 추측도 나온다.
한편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은 8일 한미연구소 관련 업무를 담당해왔던 김준동 부원장을 9일자로 무역정책팀 선임연구위원으로 발령냈다
[워싱턴 = 이진명 특파원 / 서울 = 오수현 기자 / 문재용 기자]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