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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의학과 진료기록처럼 보일지도 모를 이 책은, '정신’이라는 이름을 가진 한 여성이 40여 년간 모아온 영수증과 그 뒷면에 적어 내려간 삶의 기록입니다. 방송인 홍진경이 “지금 나를 온통 흔들고 있는 존재”라고 고백했던 바로 그 친구, 정신 작가가 21년 만에 신간으로 돌아왔습니다.
정신은 23세부터 매일매일 영수증을 모아왔습니다. 그 사이 모인 영수증은 2만 5천장ㅡ사랑하고 사랑받으며 20대를 보내던 정신은 어느덧 40대가 되었습니다. 30대엔 인생의 단 한 사람을 만나 단단한 일상을 꾸릴 것만 같던 기대와 달리 40대의 인생도 여전히 막하고 흐릿합니다. 일도, 가족도, 주위 환경도 모두 안개처럼 불확실하게 느껴지던 어느 날 정신은 자신을 둘러싼 공간과 인간관계의 ‘반경’을 넓혀보라는 조언을 듣고 훌쩍 미국으로 날아갑니다. 미국의 한 성당 앞에서 울며 기도하던 시간, 인생에 흉터를 남긴 악역들과 싸우고 견디고 그들이 남긴 독을 치유하던 시간들, 인생의 단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과 대화하고 부딪히던 순간들이 책에 차곡차곡 담겼습니다.
여전히 소중한 사람들에게, 또 지켜내야 할 자기 자신에게 무언가를 사주고 선물하며 물건과 장소에 깃든 감정을 기록하는 정신. 그녀는 생의 어둠 속에서 끝내 빛을 찾아냈을까요? 타인의 성실한 기록을 들여다보며 독자 또한 자기 삶의 소소한 풍경을 다시 바라보고 싶게 만드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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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왜 이토록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운가? 동시에 어떻게 이토록 아름다운가?” 2024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한강이 신작 산문집 <빛과 실>로 우리 곁에 돌아왔습니다. 노벨문학상 수상 강연문을 비롯해 미발표 시와 산문, 그리고 2020년부터 2024년 사이 작가가 북향의 방과 정원에서 써내려간 일기까지 한 곳에 모였습니다.
빛이 거의 들지 않는 북향의 정원에서 햇살 한 줌을 붙들기 위해 탁상용 거울의 방향을 바꾸어가며 견뎌낸 일상. 그 속에서 자라난 식물들…한강의 문장은 조용하고도 집요하게 일상을 비추며 생의 근원을 파고듭니다. “글쓰기가 나를 밀고 생명 쪽으로 갔을 뿐”이라는 작가의 고백은 문학이 무엇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지를 다시 생각하게 만듭니다.
책장을 넘기다 보면 흑과 백, 글과 사진이 교차하며 작가의 낮과 밤, 고요와 동요가 번갈아 독자 앞에 놓입니다. 유년의 기억이 저장된 오래된 노트에서 시작된 질문은 팬데믹 시대의 정원으로 이어지고 연둣빛 잎사귀 사이로 스미는 햇살을 통해 다시 생의 기쁨으로 귀결됩니다. 특유의 조용함으로 어떤 소음보다도 분명히 독자를 멈춰 세우는 한강의 글은 인간과 세계, 언어와 생명이 만나는 지점에서 우리가 여전히 희망을 상상할 수 있음을, 문학이 여전히 체온을 지닌 언어임을 증명니다. '이 행성에 깃든 사람들과 생명체들의 일인칭을 끝끝내 상상하는 일', 그것이 우리가 문학을 통해 마주하고 싶은 세계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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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단 25주년을 맞은 여태천 시인이 다섯 번째 시집 <집 없는 집>을 펴냈습니다. 여기서의 '집'은 편안한 휴식처로서의 익숙한 곳이 아닙니다. 태어나는 곳이자 죽는 곳이며, 몸과 이름처럼 떨쳐낼 수 없는 존재의 자리…안개, 먼지, 얼음처럼 쉽게 부서지고 사라지는 이미지로 그려지는 집은 생활의 공간이라기보다는 누군가의 흔적만 남은 '폐허'에 가깝습니다.
시인은 그런 장소들을 ‘친구’와 함께 걸어갑니다. 이 친구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이며, 죽음이나 자아의 분신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시인이 그려낸 생활은 결코 마냥 아름답지 않습니다. 치매를 앓는 부모가 내지르는 비명, 갑자기 걸려오는 전화 한 통처럼 독자의 일상에 불쑥 침입합니다. 시인은 그런 장면에서 인간의 피로와 분노, 무력감을 포착합니다.
후반부에는 ‘포비아’ 연작 16편이 실려 있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는 일부터 저녁에 잠드는 일까지, 사소한 일상에서도 불안을 느끼는 일상이 낯설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사람을 만나고, 진심을 말하는 일조차 불안하게 느껴
[심가현 기자 gohyun@mb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