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 분야에선 한국인 명함을 내밀기 어렵던 시절 미국 연예계에서 전대미문의 성공을 거둔 자니윤은 1980년대 말 우리나라에 토크쇼를 소개하고 붐을 일으킨 장본인입니다.
하지만 그가 뜻하지 않게 한국 정치에 남기고 떠난 상흔을 기억하는 사람은 드문 것 같습니다.
거의 일평생 미국과 한국에서 연예인으로만 산 그가 잠깐이지만 정치와 연을 맺은 건 박근혜 전 대통령과의 인연 때문입니다.
자니윤은 2007년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이 미국 로스앤젤레스를 방문했을 때 '박근혜 후원회' 회장을 맡았으며, 2012년 대선 때는 박근혜 캠프에서 재외선거대책위원회 공동위원장에 발탁돼 해외동포들의 표심을 잡는 데 앞장섰습니다.
그런 그가 박 대통령 당선 직후 한국 국적을 취득하자 정가에선 한국관광공사 사장에 내정됐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돌았고, 그러다가 2014년 관광공사 감사에 임명됐습니다.
하지만 그때, 훗날 박근혜 정부의 몰락을 가져올 중대 사건의 씨앗이 싹텄다는 건 아무도 몰랐습니다.
진상은 2년여가 지난 2017년 초 박근혜 정부에서 첫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을 지낸 유진룡 전 장관의 입을 통해 드러났습니다.
유 전 장관은 2017년 초 블랙리스트 재판 증인으로 출석해 2014년 장관직을 사임한 건 "자니윤을 한국관광공사 감사로 임명하라는 지시 때문이었다"고 밝혔습니다.
지시는 김기춘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에게서 내려왔는데 낙하산 인사라며 반대하다 자리에서 물러나게 됐다는 증언입니다.
문체부 당시 고위관계자는 "청와대에선 애초 자니윤 씨를 관광공사 사장에 내정했었지만 내정 사실이 새어나가자 입장을 바꿔 감사로 받으라고 지시했다. 문체부에선 감사도 어울리는 자리가 아니라 관광공사 고문을 제시했었다"고 말했습니다.
유 전 장관은 박근혜 정부에서 조직적으로 문화예술에 대한 사찰·검열을 자행하고 진보 성향 예술인들을 지원에서 배제한 사실을 폭로해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를 사건화한 핵심 인물입니다.
흔히 역사에서 가정은 무의미하다지만, 문화예술계에선 만약 자니윤과 유 전 장관의 악연이 없었다면, 그래서 강직함으로 정평이 난 유 전 장관이 문화정책 수장 자리를 더 오래 지켰더라면 이후 상황은 좀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말이 나옵니
자니윤은 78세 노령에 관광실무 경험도 없이 관광공사 감사에 임명돼 구설에 올랐지만, 블랙리스트 사태와는 무관합니다.
박근혜 정부의 출범을 도와 논공행상이 있었지만, 그를 통해 국정농단 같은 박근혜 정부의 실정을 언급하기도 어렵습니다.
다만 그는 우연히 한국 정치의 거대한 변곡점 위에 서게 됐다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MBN 온라인뉴스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