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전 전성태(46)는 몽골에서 6개월을 지냈다. 작가생활에 대한 위기감이 있던 무렵이었다. 상업적으로 성공한 작가가 아닌탓에, 책을 내겠다고 원고를 넘겼을때 반갑지 않은 작가가 되면 어떡하나 싶었다. 가져간 책 중에 ‘모던수필’(2003)이 있었다. 일제시대 작가 김남천이 이효석의 생전을 회고며 1942년에 쓴 ‘효석과 나’라는 글이 실린 책이었다.
‘효석과 나’에서 평양 만수대 효석의 집을 찾은 김남천은 아내를 잃은 그의 여위고 가느다란 손끝을 쥐고 위로를 한 뒤 돌아온다. 그리고 얼마뒤 서른 여섯에 그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는 비통한 부고를 접한다. “나는 그것을 들고 어머니를 잃도 또 일 년 만에 아버지를 잃은 세 아이를 오랫동안 생각했다.”
전성태는 남겨진 아이들 생각에 가슴이 아팠다. 10년이나 그 글이 머리속을 떠나지 않은 건 작가라는 이유로 내 아이들에게 불행한 삶을 안겨주면 어떡하나라는 두려움이었다. 남겨진 아이들이 늘 궁금했다. 지난 3일 그는 그렇게 궁금했던 이효석의 차남 이우현에게 전화를 받았다. 이효석문학상 수상자가 되었다는 전화. 작가 생활의 극심한 슬럼프를 겪던 전성태에게 이효석문학상은 운명처럼 찾아왔다.
6일 매경미디어센터에서 만난 전성태는 “전화를 받고, 목덜미를 타고 내리는 땀을 닦으며 내게 찾아온 행운에 대해 생각했다. 저하고는 멀리 있는 상이라고 생각해서 정말 놀랐다”고 말했다.
수상소식을 듣기 직전 그는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힘겨운 상황이었다고 고백했다. 전업작가로만 20년. 그는 매일매일 비어가는 쌀독을 걱정하는 가장이었다. 특히나 작년과 재작년 2년은 어머니와 어버지를 차례로 떠나보내고, 거의 소설을 쓰지 못하다시피했다. 그래서 수상소식은 커다란 격려였다. 작가로 계속 글을 써도 좋다는 격려.
전성태의 소설은 농촌에 기반한 언어적 감수성을 꾸준히 그려 주목받았다. 그 언어의 뿌리는 어디서 왔을까. “중학교때까지 고흥에서 자랐는데, 그 언어세계를 벗어나기가 어려웠어요. 또 다른 언어가 나한테 오는게 힘들었던거죠. 이 뿌리를 버릴 수 있으면 버리고 싶었는데, 20년동안 그 시기가 안왔죠. 지금은 이게 내 문학 세계가 됐습니다. 게다가 우리말은 수천년동안 농경사회에서 자라난 언어니까요.”
그는 10여년전 어머니의 치매 발병으로 서울에서 천안으로 거쳐를 옮겼다. 간병을 하기 자유로운 형편이어서 내려갔는데 이를 계기로 6남매 중 제일 대면대면한 아들은 8년동안 곁을 지키며 가장 가까운 아들이 된거다. ‘두번의 자화상’에는 어머니에 대한 글이 많다. 지금은 돌아가신 그의 어머니는 걸어다시는 사전이었다. “어린시절 아리송한 기억들, 흐릿한 기억들을 물어보면 맞춰보면 기가막히게 알려주셨죠. 어머니 말동무를 많이 했어요. 34살 총각때까지 같이 살았으니까. 한글은 읽긴 하셨지만, 아들 소설은 읽기 어려워하셔서, 제가 이야기로 들려드리면 ‘어떻게 너가 내 속에 들어와있냐’ 하셨죠. 어머니에게 소설은 그 사람의 맺힌걸 풀어주는거였나봐요.”
작가는 20년동안 5편의 소설을 낼 만큼 느리게 썼다. 장편은 ‘여자 이발사’ 한 편 뿐이다. 그는 “원고료로 살아가는 사람이라 여러번 장편도 시도를 하고 싶었지만, 여력이 없었다. 늘 3달 생활비만 있으면 장편을 쓸텐데 싶었는데, 수상소식에 부도난 회사가 한고비 넘기게 됐구나 싶었다”고 말했다. 지난 여름부터 문예지 창비에 연재하고 있는 그의 두번째 장편 ‘늙은 햄릿’은 70년대를 배경으로 스포츠영웅들의 이야기를 아련하게 그리고 있다. 그의 고향 장흥은 레슬러 김일 등 격투기 선수의 산실이었다고.
그는 비록 한줌일지언정 자신을 격려해준 독자들을 위해 계속 글을 쓰겠다고
[김슬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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