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환기, 뉴욕아뜰리에,1971 |
미국 뉴욕에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수화 김환기(1913~1974)는 이참에 뉴욕에 들러 한두 달 경험을 쌓을 작정이었다. 당시 뉴욕은 바넷 뉴먼과 마크 로스코 등 추상표현주의 화가들이 세계 화단을 휩쓸던 때였다. 짧게 머물 예정이었지만 그는 끝내 뉴욕을 떠나지 않았다. 한번도 고국에 돌아오지 않고, 홍익대 미대 학장이라는 ‘감투’도 훌훌 내던졌다. 국내서는 이미 거장이었지만 “세계 무대에서 객관적으로 평가받고 싶다”는 바람 때문이었다. 그의 나이 쉰 살. 모두가 안정을 추구하는 나이에 그는 모든 명성과 활동을 버리고, 새로운 여정을 떠났다. 1974년 뉴욕에서 뇌출혈로 숨을 거두기 직전까지 장장 11년간 캔버스 위에 무수히 점을 찍어나갔다. 역경과 고난, 가난과 외로움이 빚어낸 예술혼 덕분일까. 단색화의 거두 박서보 화백은 지금도 “김환기가 말년에 뉴욕에서 점을 찍지 않았다면 오늘날의 수화는 없었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김환기의 부인 김향안 여사가 1993년 세운 환기미술관에서 ‘김환기의 뉴욕시대: 추상정신과 숭고의 미학’이 열린다. 단색화 열풍으로 국내 추상 회화에 대한 재조명이 활발한 가운데 ‘화단의 블루칩’ 김환기의 예술혼이 정점을 찍었던 뉴욕시대 작품만 선보이는 자리라서 주목받고 있다.
한국 현대미술의 거장 김환기의 작품은 크게 구상과 추상 작품으로 나뉜다. 산, 달, 강, 매화, 백자 등 우리 자연과 문화의 아름다움을 구체적인 형태로 표현하던 시기는 1950년대까지 이어졌다. 특히 일본 유학시절과 6·25전쟁 시기를 거쳐 파리 시대(1955~1959)에는 구상성이 압축적으로 표현되던 시기였다. 뉴욕 시대는 완전 추상으로 몰입하게 되는 여정이라 할 수 있다.
전시는 말년 11년간 집중적으로 그렸던 전면 점화 50여 점과 미공개 과슈·드로잉 150여 점 등 총 200여 점이 나온다. 모두 환기미술관 소장품이다. 뉴욕시대 작품만 집중 선보이는 것은 10여 년 만이다.
특히 숭고라는 미학 개념을 들어 전시를 구성한 점이 특징이다. 박미정 환기미술관 관장은 “마크 로스코가 인간에 내재된 비극성에 초점을 둔 숭고 정신을 보여준다면 김환기는 도덕경을 비롯한 동양정신을 바탕으로 낙관적이며 긍정적인 숭고 미학을 보여주는 게 차이”라고 설명한다.
관람객은 전시장 1층에서 2~3층으로 올라가면서 김환기의 추상성이 ‘숭고미’의 절정으로 치닫는 과정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마지막 3층이 하이라이트인데, 창가에 햇살이 쏟아지기라도 하면 그 충만한 느낌은 더 고양된다.
김환기의 말년 점화는 세계적으로도 큰 관심을 끌고 있다. 이중섭과 박수근과 같은 시대를 살았지만 김환기는 풍부한 해외 경험을 통해 세계적으로 보편적인 미감을 획득했다는 평가다. 뉴욕시대 작품 6점은 다음달 개막하는 베니스비엔날레 특별전에 한국 단색화와 함께 나란히 걸린다.
생전 그의 일기를 펼쳐보면 그가 얼마나 뉴욕에서 고군분투했는지 미뤄 짐작할 수 있다. 1965년 1월 2일 일기에서 그는 “아침부터 백설이 분분… 종일 그림을 그리다. 점화가 성공한 것 같다. 미술은 하나의 질서”라고 썼고, 1967년 10월 13일에는 “봄내 신문지에 그리던 중에서 나는 나를 발견한다. 내 재산은 오직 ‘자신自信’뿐이었으나 갈수록 막막한 고생이었다. 이제 자신이 똑바로 섰다. 한눈팔지 말고 나는 내 일을 밀고 나가자. 그 길밖에 없다”고 적었다. 고국에 있는 딸에게는 “낮에는 태양볕이 아까워서, 밤에는 전깃불이 아까
이상규 K옥션 대표는 “한때 파리 시대 구상 작품이 선호도와 가격 면에서 월등했지만 지금은 말년 김환기의 작품을 구하려는 움직임이 치열하고 그 결과 값도 크게 올랐다”고 말했다. 전시는 6월 28일까지. 관람료는 성인 8000원. (02)391-7701
[이향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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